중등부 단기선교 후기 (벧전 3:8-9)

중등부 단기선교 후기


8월 9일 출발 당일에도 저는 이번 선교를 통해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어떤 일을 이루실지 알지 못했습니다. 팀원 중 유일하게 칼출근을 해야 하는 직장인이었던 까닭에 준비 기간 중 새벽기도하고 아침만 먹고 출근을 해야 했고 마임, 찬양은커녕 간단한 일본어 회화 그리고 영적인 준비도 되지 않은 솔직히 스스로에 대한 적지 않은 실망감을 안고 출발을 했습니다. 출발 당일까지도 아이들 이름을 제대로 외우지 못하고 팀에서 아무런 할 일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제가 붙들었던 말씀은 잠19: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 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2001년 중국 연변 비전 트립을 떠나면서 비슷한 상황에서 의지했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기도 가운데서 분명 하나님은 이번 선교를 통해 내 안에 역사하시고 나를 통해 뜻을 이루시길 원하신다는 믿음과 확신을 갖고 출발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내 머리로는 알지 못하지만 차차 안개가 걷히듯 보여줄 것이라는 확신과 기쁨이 제 안에 있었습니다.


첫째 날 도착 직후 역시 신실하신 하나님은 내가 일본에 왜 왔는지 이유를 알게 하셨습니다. 이혜진 선교사님의 선교 특강을 통해 일본의 근대 기독교 핍박에 대해 알게 되었고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일본 사람의 폐쇄적인 성향, 일본인 친구들을 통해 보아왔던,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신뢰를 주지 않는 그들의 성향에는 극도로 잔인한 일본 근대 기독교 핍박에 그 백그라운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거리의 일본인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나로 하여금 그들의 상처를 깊이 체휼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최근 저는 우리반의 한 학생을 여름수련회에 초청하면서 그 학생에 대한 깊은 긍휼의 마음을 체험했습니다. 그 학생의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났습니다. 처음에는 알지 못했지만 그런 마음이 바로 그 학생이 앞으로 겪게 될 아픔과 상처가 이미 내가 사춘기 때 겪었던 큰 상처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수련회가 끝난 후 기도 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대해서도 본격적인 일정에 앞서 그들이 갖고 있는 아픔과 상처를 먼저 보여주시고 그 아픔을 마음으로 겪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너무 섬세하고 감사했습니다. 바로 ‘상처 입은 치유자 – Wounded Healer’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4박 5일의 일정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습하고 무더운 날씨에 몸이 지치고 길거리에 그냥 쓰러져 잠들고 싶을 정도로 육체적인 한계를 경험했습니다. 4일째 날 한 신사 앞에서 기도할 때에는 아찔한 현기증과 구역질에 귀신이 내 몸을 들락거리며 기도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느껴졌습니다. 10분도 안되는 짧은 기도 속에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승리를 선포하며 평안함을 찾을 수 있었지만 난생 처음 겪는 마귀의 직접적인 공격, 무더운 날씨로 인한 육체의 한계, 모두가 지쳐서 하나되지 못하고 영적 싸움에서 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등은 저에게 마귀의 큰 도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도전에서 결국은 승리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나중에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지만 비전교회 이혜진 선교사님은 저와 같은 캠퍼스 선교단체 출신입니다. 그런 공통점 때문인지 선교사님과의 대화가 즐거웠습니다. 선교사님께서는 그런 대화 중에 저에게 꼭 일본에 와서 사역하라는 말씀을 4-5번에 걸쳐서 하셨습니다. 그냥 지나가는 말이 아닌 진지한 콜링이었습니다. 이미 호주 원주민 자비량 선교에 비전을 갖고 인생의 방향을 그쪽으로 향해서 살고 있던 저에게 일본으로 오라는 진지한 말씀은 나의 남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라는 말이나 다름 없는 말입니다. 당연히 거부감이 들어야 하고, 평소의 저였더라면 두말할 것 없이 정중한 거절의 말이 나왔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저는 그때마다 선교사님 앞에서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일본에 대한 상한 마음을 내 안에 주셨는데 선교사님의 그 요청을 거절할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앞으로의 제 인생을 제가 모든 것을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케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해야 할 곳이 일본이든 호주든, 중국이든 북한이든 오직 하나님이 인도해주시는 대로만 따라가겠다는 다짐을 했을 때 역시 마음에 평안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일본 총리가 광복절에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한 뉴스를 보며 전 이전과는 다른 일본 민족과 그 지도자에 대한 불쌍한 마음으로 다가왔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단기 선교를 통해 내 안에 이루신 성령의 열매로 인한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제는 일본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중보자의 위치에 서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 알게 된 이상 과거 그들이 우리에게 했던 일들이나 현재 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는 시사 이슈들과는 100% 별개로 일본에 대한 상한 마음을 품고 기도하고자 합니다. 한국에 도착한 후 기도를 하며 이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단기 선교를 통해 내 안에 이루신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 받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3:8-9)

열매를 맺기 위한 기본…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7)


오랫동안 열매가 없는 내 삶은 무엇이 문제일까? 오랜 고민이다. 작년쯤부터 들기 시작한 이 생각은 최근에는 깊은 고민이 되었다. 대학교 2학년부터 전도와 제자 양육에 헌신을 했지만 단 한 명의 제자도 세우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분명히 준비되지 못한 점이 있을 것이라 생각을 해왔다.


우리 교회에서 매주 목요일에 열리는 부흥을 위한 연합 기도운동에 갔다. 그 모임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 경건에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벧후 1:5-7) 말씀을 통해 내 마음에 한가지 말씀하신 게 있다. 과연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덕이 되고 있는가? 타인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가… 지금까지 내가 고전 9:19 말씀을 내 인생의 모토로 삼고 사람을 위해 기꺼이 사람의 종이 되겠다고 다짐했었지만 실제 내 삶의 모습은 정말 그렇지가 못한 것 같다.


난 중등부에서 외적으로 볼 때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나 보다. 전도사님은 가끔 나를 공개적으로 칭찬도 하신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나를 책망하는 사람이 없는 환경에서 나는 자신에 대한 착각에 빠진 것 같다.


사도행전 2장에서 보여지는 초대교회 교인들의 모습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는 사랑이다. 지금의 내 모습과는 완전히 반대의 모습이다. 열매 맺기 위해 사람을 붙들고 안간힘쓰지 않아도, 당장 열매가 없다고 낙심하고 고민하지 않아도, 그저 다른 사람에게 나의 모든 것을 오픈하고 하나되어 하나님을 찬양할 때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던 것을 볼 수 있다. 부흥의 기본은 투명한 삶이라고 한다. 사도행전 말씀에서도 열매 맺는 삶의 모습은 투명한 삶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마치 예수님이 제자들과 항상 함께하시며 그 모든 삶을 제자들에게 오픈하셨던 것처럼… 내 삶이 은혜 가운데 투명해지고 사람들에게 숨기고자 하는게 없어질 때가 바로 나로 인해 열매가 풍성하게 열리게 되는 시작점이 되는 것 같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숨기지 않는 삶.. 하나님과 사람에게 동일하게 오픈되는 삶이 바로 내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삶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가을에 1:1 제자 양육을 하려고 마음 두었던 2명의 중등부 아이들과 그 외 모든 우리반 학생들에게 내 삶은 오픈되어 있는가… 내 삶이 그들에게 투명해지지 않고서는 그들이 나를 통해 예수님을 보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는다. 기도중에 성령께서 깨닫게 하신 것들을 위해 기도하고 조금씩 오픈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큰 방향을 잡아야 할 것 같다.

릭 워렌(Rick Warren) 초청 목적이 이끄는 교회 컨퍼런스


릭 워렌 초청 목적이 이끄는 교회 컨퍼런스
Rick Warren
Purpose Driven Church Conference Seoul

2006년 7월 13일 (목) 오후 7:00 상암 월드컵 경기장
Jul 13, 2006 7:00PM
Seoul Worldcup Stadium.
Free of charch, no registration required.


visit
http://www.disciplen.com/seminar/2006/purpose/schedule_eng.asp
for more information. (english)

you could access seoul worldcup stadium by subway line 6.
get off the train at ‘Seoul Worldcup Stadium’ station.
bus, taxi or han river ferry are also available.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행 4:35)


오늘은 전북은행 프로젝트 관계로 전주에 출장을 다녀왔다. 기차를 타고 용산에서 전주까지, 그리도 다시 전주에서 용산까지 오는 길에 내 옆에 앉았던 3명의 사람이 있다.



용산에서 전주까지 내 옆자리에 앉게된 사람은 순천까지 가신다는 한 할머니였다. 자꾸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는지 이런 저런 이야기, 60년대 완행열차 이야기도 하시고.. 같이 도시락을 사먹으며 간단 간단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 영혼이 느끼고 있던 외로움과 고독을 나도 느낄 수 있었다.



두번째 사람은 돌아오는길 전주에서 대전까지 내 옆에 앉았던 한 대학 강사이다. 정장 차림의 그 사람은 한눈에 봐도 엄청난 스트레스와 인생이 주는 무게에 짖눌려있는듯 했다. 두려워서 차마 그에게 말을 걸지는 못했다.



세번째 사람은 대전에서 용산까지 옆에 앉은 한 아저씨.. 내 옆에 앉자 마자 술냄새가 진동을 했다. 기차를 타는 내내 그는 머리가 아픈지 엎드려 있었다…



오늘 이 세사람을 접하며 내 마음 속에 든 생각은 이 사람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잘 파악할 수 있다면 그들에 대한 접근이 훨씬 쉬워질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할머니도, 대학 강사도, 술취한 아저씨도 분명 내 옆에 앉은 시간동안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 필요를 채워줌으로서 접근한다면… 특히 세번째 술취한 아저씨의 경우 내가 두통약과 생수를 건네주었다면 마음을 열고 대화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 집에와서 들여다본 중등부 QT책 말씀은 오늘 나의 생각을 정리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줌이라…” (행 4:35) 복음을 전하겠다는 열정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주위 영혼들의 필요를 잘 파악하고 적재 적소에서 필요를 채워줌으로서 그들이 본질인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도록 하는 것… 이것을 위해 지혜와 사람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주시도록 간구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전으로 포장된 욕망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 (중략)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마 4:5~7)


마귀의 그럴듯한 도전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을 보면 그분의 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전병욱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다시한번 접하게 된 예수님의 광야 시험에서 또다른 지혜를 발견한다.



말씀에서 볼 때 마귀의 도전은 매우 그럴듯 하고 생각이 없으면 그냥 넘어갈만도 한 도전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아를 철저히 부인하셨기 때문에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라는 지혜로운 대답을 하실 수 있으셨다.



기독교의 본질은 자기 부인이다. 물론 자기 긍정을 통해 더 깊은 영적인 세계로 나아가고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기 부인이 필요하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기독교에서의 자기 긍정도 결국에는 나 스스로의 능력이 아닌,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계획이다.



대학생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던 일, 찬양팀의 리더가 되고 팀원들을 리드하며 예배를 인도하던 일, 그리고 최근 주일학교 교사로 사역하며 여러 사람들과 부딪치고 사람들 앞에 서게 되는 일을 많이 겪으면서 수시로 이런 마귀의 시험은 나에게 유혹한다. 하나님의 능력인 것처럼, 그분의 은혜인 것처럼, 그분의 계획인 것처럼 나의 개인적인 욕망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사람들 앞에 드러낼 때의 그 짜릿한 쾌감… 바로 죄가 주는 쾌감이다.



나에게 있어서 그런 유혹의 순간에 붙들 것은 십자가 뿐… 항상 깨어있어 지혜롭게 그분의 일을 감당해 내는 제자가 되길…
 

죄에 대한 승리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요일 3:1)




얼마 전부터 나에게 항상 도전되는 말씀은 요한일서 3장 말씀이다. 그 말씀에 의하면 구원받은 백성은 절대 죄를 지어서도, 아니 지을 수가 없다는데.. 왜 나는 구원받은 후 지금까지 여전히 알게 모르게 죄를 짓고 있는가… 내가 죄인임을 애통하게 고백하며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과 첫사랑의 기쁨, 감격을 누렸었는데 지금의 내 모습은 여전히 죄인이다. 어떻게 보면 누구나 빠질 수 있는 딜레마이다. 요일 3:6~10에는 하나님께 속했다면 절대로 죄를 지을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건 99.9%의 크리스천에게 엄청난 고민거리일 것 같다.





난 얼마전 한 성경공부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도전을 받았다.  여전히 죄인된 내 모습에 반해, 성경에서는 죄를 짓는다면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라고 아예 못박아 이야기하고 있다. 그 모임에서는 죄의 현상이 있다면 그것은 구원받지 못한 것이라고 단정짓는듯 했다. 한동안 구원에 대한 혼란스러움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묵상을 통해 새롭게 발견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요일3:1절, 2절에서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다. 사람이라는 존재의 연약함과 한계는 성경 역사에 걸쳐서 잘 묘사된다. 다윗이 그러했고 바울도, 베드로고 그랬다. 구원받았지만 연약함으로 인해 항상 쓰러지는 모습. 하지만 그들은 죄 자체를 즐기고 먹고 마시지 않았다. 다윗도, 바울도, 베드로도 죄를 극복하고 승리하기 위해 분명 몸부림쳤을 것이고, 범죄했을 때에 분명히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자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에게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즉 마귀의 자식이 죄를 범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아이덴티티가 있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크고 작은 죄문제 하나하나에 대한 죄책감과 쓸데없는 고민 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고한 identity인것 같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이런 사소한 죄는 범해도 좋다라는 또다른 자기 합리화의 길을 찾고자 하는것이 아니다. 내가 근본적으로 다른, 새롭게 거듭난 존재라는 것을 항상 잊지 않고 매 순간 순간 삶의 문제와 도전을 상대할때 가장 값진 승리를 맛보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람을 얻는 인생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 9:19, 개역개정)


바울이 그 인생을 통해 가장 이루고 싶었던 일은 무엇일까?
물론 내가 그 시대에 그와 함께 살아보지 못해서 잘은 모르겠지만 그의 인생 최대의 가치관 중 하나는 분명 ‘사람’이었을것이란 생각이 든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뛰어나고 가장 존귀하고 가장 가치있는 존재인 사람.. 한사람 한사람을 ‘우주’라고 표현해도 좋을만큼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빼다 박은 ‘사람’… 잃어버린 한 영혼이 돌아올 때 천국에서는 잔치가 벌어진다고 하니…



고린도전서 9:19 말씀을 통해 그가 사람을 얻기 위해 스스로 자존심까지도 버렸을 모습이 떠올려진다.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롭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사람을 얻고 더 많은 사람을 구원시키기 위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고백한 바울은 자신의 인생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가장 가치있게 사용한 사람중 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된다.

원수까지 감동시키는 삶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삼상 24:6~7a)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



그에게 찾아온..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위기의 순간 또는.. 결정의 순간에 항상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하였을 때 결과적으로는 승리하는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처럼 내 인생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원리는 의외로 간단한 것같다.






삶에서 부딪치는 수많은 문제들. 그 문제들을 놓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순간 순간 하나님이 주시는 한마디 한마디의 작은 말씀들이 결국 나로 하여금 절대로 삶의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는 가장 지혜로운 전략적인 삶.. 멋진 인생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 확신한다.






결국 원수인 사울의 입에서 조차 다윗을 향한 찬사가 흘러나오게 되었다.



다윗의 삶이 결국 승리로 끝나게된 원동력이 이것이 아닐까..?



난… 원수까지도 감동시키는 삶을 살고 싶다.

양심에 대한 재발견(?)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요일 3:21)


사람의 마음에는 누구에게나 양심이 있다.
양심은 내 마음 속의 작은 하나님이라고도 한다.
어떤 일에 대한 판단이 자신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갖게될 수 있는 이유인 것 같다. 물론 자신의 양심이 성경의 가치관대로 올바르게 자리잡아야겠지만…
이 말씀으로 생각할 때 어떤 일이 나의 양심에조차 반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용서와 용납의 하나님을 억지로 끌어들여 자신을 합리화하려고 했던 많은 기억들이 떠오른다.
십자가 복음을 너무 값싼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 예수님은 나의 사소한 죄문제 하나 하나를 위해 그토록 고통당하셨건만…

나를 발견하고 기대하는 2006년

이 글은 여호와앞에 요셉같이 (사랑의교회 중등부 QT책) 2006년 1월호에 실린 원고입니다. 책에 실린 원고는 약간 편집을 거쳤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발견하고 기대하는 2006년




2005년 1 1 0. 저는 송구영신 예배에 혼자 와서 이유 없이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앉아 있었습니다. 몇 가지 계획했던 일들의 실패와 사람과의 관계로부터 받은 실망감, 사회 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부담감 등
어쩌면 그 눈물은 감사와 찬송의 눈물이라기 보다는 그 동안 받았던 상처와 배신감, 부담감으로 고통 받다가 한 순간 아버지 품에 안겨 서럽게 우는 어린아이의 눈물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라는 찬송가 가사가 어찌나 내 마음을 때리던지



 



한 해를 이렇게 우울하게(?) 시작했지만 지난 2005년의 수개월간 양육과 묵상 속에서 조금씩 나의 가치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저에겐 많은 포지션이 있습니다. 사랑의교회 주일학교 교사로서의 나, 대학시절 함께했던 믿음의 친구들 가운데의 나, 9다락방 총무로서의 나, 우리 집 장남으로서의 나, 회사 직원으로서의 나, 어떤 사람을 많이 사랑했던 남자로서의 나, 심지어는 자아도 없이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자처했던 사람으로서의 나 2005년과 그 전에는 라는 존재감을 갖게 할만한 여러 가지 이유와 포지션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저는 이러한 이유들에서 자유하게 되어 어느 누구도, 어떤 과거도 개입하지 않은, 예수님 앞에 발가벗고 서있는 죄인으로서의 나를 다시 한번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와 사회의 여러 가지 타이틀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견되는 모습이 아닌 보이지 않는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찾아가는 나의 모습. 솔직히 말해서 이건 참 어렵습니다. 니모를 찾아서를 보셨다면 이해하실 수 있겠죠. 마지막 장면에 어항 속에 있던 니모의 친구 물고기들이 극적으로 바닷물로 탈출하고 환호하지만 묶여진 비닐봉지 속에 들어있는 자신들의 모습들을 보고선 Now what?! 이라는 마지막 대사를 남기고 영화가 끝나버립니다. 극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구원받아 일단 새로운 영적 세계에 풍덩~ 빠져들었지만 자신의 모습을 확실하게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의 고민 Now what?! 어찌 보면 27살의 어른이 하기엔 많이 늦은 고민이 아닌가 싶고, 주일학교 교사가 어찌하여 이런 고민을 하고 있냐고 손가락질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께 가장 영광이 되는 것인지, 내가 정말 사랑하는 일이 무엇인지, 당장 2, 3년 후에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조차 잘 알지 못하는 27살의 어른은 28살이 되는 2006년에도 예수님과 함께하는 자아 찾기를 계속해야 할 것 같습니다.



 



2006년을 바라보는 이 시점에서 저는 기대에 부풀어 있습니다. 그 동안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나의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고 기쁨 충만할 일, 새롭게 보이실 주님의 계획들을 알게 되어 소망이 가득할 일,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과 학생들, 새로 맺게 될 관계들을 생각할 때 2005년의 시작에 비교하면 극적 반전이라고 표현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렇듯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승리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저는 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