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원주민 선교의 당위성

이 글은 호주 정훈채 선교사님 홈페이지에 소개된 호주 원주민 선교의 당위성에 대한 글입니다. 저 역시 2004년 호주에 6개월간 머물면서 호주 교회나 유럽 같은 백인들이 호주 원주민 선교를 함에 있어서 분명 한계가 있겠다는 것은 절실히 느꼈고 한국이나 기타 아시아권에서 더 많은 관심을 갖고 더 많은 선교사가 나가야겠다는 것을 느꼈었습니다.

원주민 선교의 역사

원주민 선교를 처음 시작한 때는 1880년에 호주의 몇몇 단체들이 호주 원주민 선교회를 발족하면서부터 이다. 이렇게 복음을 받은 지 1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호주 어느 곳에도 원주민 목사에 의해 목양된 곳이 한 곳도 없을 정도로 자립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는 백인 선교사들의 선교정책이 정책적으로 원주민들 가운데 영적인 지도자를 세워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0년도에 이르러서 원주민 선교는 원주민들이 직접 참여해야 된다는 주장이 팽배해지자 그제서야 원주민 복음전도회(Aboriginal Evangelical Fellowship, AEF)가 발족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원주민 선교가 26년이 지난 1996년 서부 호주의 발가 지역에 처음으로 원주민 손에 위해 교회가 세워졌는데 이것은 복음을 받은지 120년이 지난 후에 되어진 일이며 이 교회가 원주민 교회 중 유일하게 자립이 되는 교회이다. 1997년 당시 호주에서 유학을 하던 정훈채 목사가 본격적으로 원주민 선교에 참여함으로서 서서히 원주민 교회들이 세워져 가고 있다.


원주민 선교의 당위성

호주 원주민 선교는 호주 정부와 선교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대부분의 원주민들이 마음의 문을 닫고 살고 있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울분을 참지 못하여 마약과 술로 그들의 한을 풀고 있으므로 현재 이것이 사회적인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원주민들은 신분상 공공 기관에 일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들의 풍토상 적응하지 못해서 대부분 실직수당으로 살고 있다. 더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많은 원주민들이 그들만의 고립된 생활을 하므로 풍습 전수식(Aborigines Initiation Ceremony)이라고 하는 토속종교, 무속신앙에 매여 있다.

마을에서 자란 원주민 지도자들은 부흥회나 집회를 통해 회심한 후 은혜를 받아 그들 나름 대로 전도하고 있을 정도며, 간혹 성경학교를 통해 1년간 수학하고 목사 안수 없이 목사(Pastor)라고 하는 호칭을 하고 교회를 이끌어가고 있을 정도이다.

서부 호주의 원주민

지금부터 약 230년 전에 호주는 주로 유럽인들의 집단 이주를 통해 이루어 졌으나 그 전에 이미 검은 색 피부(Black Fellow)를 가진 본래의 원주민(Aborigine)들이 이 광활한 땅에 살고 있었다. 이들의 모습은 검은 피부와 이마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움푹 들어가 있어서 마치 아직 덜 개화된 사람들로 보여지며 현재도 다소 도시화 된 곳을 제외하고는 족장 중심의 생활을 하고 있다.

서부 호주에는 공식적으로 119개의 공동마을이 있으며 이외에도 내륙지역에는 모든 문화를 거부한 채 옹기종기 모여서 살고 있는 원주민을 볼 수 있다. 비록 도시 주변에 사는 원주민들이라 할지라도 지금까지 백인들 틈에 적응하지 못하고 별도의 삶을 살고 있으며 여러 면에서 사실 소외된 삶을 살고 있다.

지금까지 호주 정부와 유럽계(European) 여러 선교단체들이 여러 방면에서 선교를 시도해 왔지만 번번이 실패해왔다. 그 이유는 유럽계 사람들이 호주 땅을 점령하면서 원주민들을 지구상에 멸종시키려 약 27만 명에 이르는 원주민들을 대량학살 한 일이 있으며(실제로 태즈매니아 섬에는 완전히 멸종시켰음), 한 동안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원주민 자녀들을 부모와 결별시켜서 집단 수용생할을 하게 하였으며 또한 정부가 선교단체를 통하여 정치적으로 통제하는 제국주의적인 선교를 해 왔으며 원주민들은 저주 받은 함(흑인)의 자손이므로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비성경적인 논리로 자기 동족을 위한 원주민 지도자를 양성하지 않은 일들로 인하여 백인들 및 그들의 선교단체를 불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원주민들은 약 30만 명 정도 추정하며 이들 중에 기독교인들은 약 2%에 불과하다. 이들이 쓰는 언어는 내륙을 중심으로 약 100여개의 방언을 가지고 있으나 대부분은 영어권 안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해외선교도 이제는 분업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날이 가면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사람들이 하는 일도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는 경향이다.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하던 신종 직업들이 새로 생겨난다. 지금까지 혼자 해 왔던 일들이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이 세분화되면서 발생한 일이다. 이를 일의 분업화(分業化)라고 한다. 따라서 지식과 기술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일의 분업화는 더 한층 가속화되는 것이 오늘의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지부동(搖之不動)인 영역(領域)이 있다. 세상이 변하고 사람들이 하는 일이 여러 가지로 다양해지고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고 있는 영역이다. 그게 어떤 영역이라고 생각하는가? 바로 한국교회의 해외선교현장이다. 사회가 다양화되어 제 아무리 복잡하고, 일의 분업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지만, 한국교회가 파송한 해외선교현장에서는 여전히 한 사람의 사역자에게 만능의 재주가 요구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우리나라가 글로벌 시대의 지구촌에 우뚝 솟은 선교대국이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다. 미국교회 다음으로 지구촌 방방곡곡에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했다. 불과 선교 200년이 훨씬 미치지 않은 상황에서 일궈낸 엄청난 쾌거이기에 얼마든지 자랑할만 한 일이다. 그러므로 지금 세계교회는 한국교회를 크게 부러워하고 있다. 따라서 지구촌 어느 곳에서도 한국교회가 파송한 사명자는 대체적으로 환영을 받는다.


그렇지만 아쉬운 것이 있다. 한국교회가 지구촌에 파송한 대부분의 사명자들은 아직도 오늘날과 같이 다양성의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시대에 역행(逆行)하는 삶을 살거나, 살기를 강요받고 있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에게서는 선교사역의 분업화를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다. 서로가 협력을 기대하면서도 가장 협력이 되지 않고 있는 영역이 있다면, 그곳은 곧 한국교회의 해외선교현장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다.


만일 한국교회가 해외선교현장에서 여러 사명자들이 서로 일을 나누어 분업화한다면 얼마든지 사역의 효율을 높일 수 있다. 따라서 많은 사명자들이 이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어느 한 사람 이런 일을 반대하거나 부정하는 이들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국교회의 해외선교현장에서는 여러 사명자들이 각자의 일을 적절하게 나누어 분업화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차라리 전혀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왜, 한국교회의 해외선교현장에서는 사역의 분업화에 대한 필요를 느끼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일까? 누군가 자기를 위해 일해주기를 원하면서도 자신은 다른 이를 돕는 일에 인색한 탓은 아닐까? 그래서 다른 이들과 나누어 분업화하면 아주 쉽고 재미있게 감당할 수 있는 사역을 홀로 감당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참으로 한국교회의 해외선교현장에 있는 사명자들이 사역을 고달프고 힘들어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은 아닐까?


선교현장에서 사명을 감당하려고 몸부림치는 사명자에게는 누구인가의 도움이나 협력이 아주 중요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만 가지 재능을 가진 것이 아니기에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도우며 협력하는 일이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도 그 일이 쉽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왜 나홀로 만능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일까? 모든 일을 혼자의 힘으로 다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일까?


물론 일부 해외선교현장에서는 현장의 특정상 다른 이와 일을 나눌 수 없는 특수한 상황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각자 개인의 신분보호를 위해 삼가 조심해야 할 충분한 이유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너무 무리하게 일을 나누어 분업화를 시도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한국교회의 해외선교현장에서 지나친 경계와 몸사림이 서로가 일을 나누는 분업화를 엄두도 못내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보았기에 아쉬움이 얼마나 컸던지 모르기에 하는 말이다.


  정말 몸을 사리는 것만이 보안(保安)일까? 그 문제로 다른 사명자들과 교류를 끊고 혼자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만 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왜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것일까? 왜 서로의 교류가 보안에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겁을 내는 것일까? 내가 경험한 대부분의 경우는 적절하지 못한 변명이었다. 차라리 핑계라고 여겨질 정도로 지나치게 서로를 불신하며 일을 나누어 분업화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물론 다른 이들과 일을 나누어 분업화하는 것이 자칫하면 필요 이상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게 될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해외선교현장의 사명자가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나 홀로 몸부림쳐야 하는 일은 적절치 못한 행동이라는 생각을 털어 버릴 수가 없다. 이런 일로 인하여 오랫동안 선교현장에서 일할 수 있었던 이들이 너무 쉽게 지쳐서 사역을 포기하고 귀국하는 이들도 적지 않게 보았기 때문이다.


좀 더 자신을 비워야 한다. 특히 해외선교현장에서 사역을 감당하려면 자신을 철저하게 비우지 않으면 다른 이들과 일을 나누어 분업하기란 하늘에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제자들을 전도대로 파송하실 때에 둘씩 짝을 지어 보내시면서 ‘너희는 뱀과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신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깊이 묵상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이들과 더불어 일을 나누어 함께 감당하고자 하는 마음을 키워야 한다.


본디 협력(協力)이란 자기 중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기가 중심이 되는 것은 협력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목적과 뜻을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는 의도일 뿐이다. 이런 경우에는 자기를 도와 자신의 목적과 뜻을 이뤄줄 사람을 고용(雇用)하거나 다른 사람을 자기에게 복속(服屬)시키는 일이 된다. 결국 다른 이를 자기 목적을 위해 강제로 일을 시키는 것이 될 뿐이다.


이런 일은 해외선교현장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이다. 한국교회로부터 해외에 파송된 사명자는 선교현장의 지배자가 아니다. 그들을 아무도 선교현장에서 군림하는 지배자나 감독자로 세우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선교현장의 백성들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파송된 일꾼이다. 그렇다면 사람을 섬기는 일이란 나홀로 독불장군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독불장군은 결코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없다. 오히려 자칫하면 군림하는 오만한 태도로 나타날 뿐이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하나님께서 주신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어떤 영화에서와 같이 슈퍼맨이나 원더우먼처럼 초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는 맥가이버와 같이 다재다능한 만능의 재주를 가진 것도 아니다. 그냥 좋아하면서, 그래서 다른 어떤 일보다 비교적 재미 있고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달란트라고 지칭하기도 하는 재능이다.


그렇다. 참된 협력이란 사람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자신의 달란트, 즉 재능을 서로를 위해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국어사전에서는 이것을 ‘어떤 일을 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 또는 어떠한 일을 하는 데에 여럿이 서로 힘을 합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일들이 해외선교현장에서 일어나야 한다. 한 개인에 의해 고용(雇用)되거나 복속(服屬)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자발적인 의지에 의해 서로가 일을 나누어 분업화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해외에 파송한 선교현장의 사명자들이 서로가 일을 나누어 분업화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일이 사명자 한 사람만의 이유일까? 아니다. 오히려 한국교회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왜냐하면 한국교회의 철저한 개교회주의와 독단이기주의적인 실적에 대한 과도한 욕구가 해외선교현장의 사명자들로 하여금 다른 이들과 더불어 일을 나누어 분업화하려는 것을 방해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해외선교현장에 사명자를 파송하고 그들이 마치 슈퍼맨이나 원더우먼라도 되는 양 지나친 실적을 요구하는 경우가 너무 흔하다. 마치 선교현장의 사명자라면 맥가이버처럼 무엇이든지 혼자서 가능한 마이더스의 손을 가진 재주꾼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일들이 결국 해외선교현장의 사명자들에게 무언의 압력이 되고, 이것이 결국은 다른 이들과 더불어 일을 나누어 분업화하는 것을 원천봉쇄하게 하는 일이 될 수 있음을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참으로 해외선교현장의 사명자들은 숨돌릴 사이도 없이 바쁘기 무엇인가 끈임없는 일을 해야 한다. 이는 그들을 파송한 실적을 한국교회가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한시도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없다. 눈코 뜰새 없이 분주하게 이리저리 뛰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많은 사명자들이 정신없이 이리저리 뛰어 다니다보면 지금 자기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가 될 때도 많다.


정말 해외선교현장에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사명자들은 만능의 재주꾼이어야 할까? 해외선교현장에서 어떤 일에 닥치든지 모든 일들을 소화시켜 감당할 만한 자격이 채워져야 하는 것일까? 한 가지 재주만으로는 사명자로서 부적격자가 되기라도 하는 것일까? 그래서 해외선교현장에서는 일을 서로 나눠 분업화하는 일이란 불가능한 일이요, 더 나아가 아예 불필요한 일이 되는 것이기라도 하는 것일까?


한국교회의 해외선교현장에서는 사역의 세분화를 통한 분업화가 이루워져야 한다. 어쩌면 이것은 시대적인 요청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바른 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국교회는 이 일을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만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건만, 도무지 변화할 줄 모른채 구습에만 젖어 있는 모습이다. 사역의 세분화 속에서 서로가 다양한 재주들이 상호존중되어 일어나는 선교사역의 분업화는 시급한 시대임을 모르고 있는 듯하다.


한국교회로부터 해외선교현장에 파송된 사명자가 해야 할 일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다. 물론 그가 해야 할 일은 그를 파송한 어떤 단체나 교회 등 집단의 이익을 위한 일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기 위해 필요한 일일 뿐이다. 그렇다면 더욱 다른 이들과 일을 나누어 분업화해야 한다. 분업이란 어쩌면 가장 단순하고 쉬운 것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기만 하면 가능한 일을 더 이상은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분업을 거창하게 이해할 이유는 없다. 개인을 위한 일이 아니기에, 자기를 파송한 단체나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도 아니기에, 정말 하나님을 위한 일에 어찌 서로 일을 나누어 분업하지 못할 이유가 존재할 수 있으랴. 자신을 파송한 단체가 다르다고, 그들의 요구가 서로 다르다고 해외선교현장에서 사명자들이 서로 외면한채 협력하여 분업하지 못한다는 변명은 어쩌면 부끄러운 핑계에 지나지 않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교회가 해외선교현장에 파송한 사명자는 대부분 성경교사가 되는 것을 선호한다. 어쩌면 그것만이 해외선교현장에서 일하는 사명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고 있다. 그것만이 해외선교현장의 사명자가 해야 할 고유의 사명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교회를 개척하거나 신학교를 세워 현지인 지도자를 양성하는 일은 해외에서 일하는 사명자의 최우선과제라고 여긴다. 따라서 이 일을 성취하지 못하면 무능한 사명자라고 자책하게 된다.


과연 그럴까? 물론 해외선교현장에 파송된 사명자가 유능한 성경교사가 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전부는 절대로 아니다. 유능한 성경교사가 아니기에 교회를 개척하지 못하거나, 신학교를 세우지 못했다고 하여 자신을 무능한 사명자로 생각하는 일은 옳지 않은 일이다. 누구에게나 비록 유능한 성경교사로서의 재능은 없을지 모르나 하나님께 유능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미용기술로 선교현장에서 부지런히 머리만 깍아주거나, 또 다른 이는 자기의 기술이나 실력으로 현지인들을 돕는 작은 일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반드시 전문 기능인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현지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섬기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헌신된 자세와 마음으로 현지인들 가운데 빛과 소금이 되어 살아가는 삶이 곧 선교현장의 사명자가 살아가는 훌륭한 생활방식이 아닐까?


왜 한국교회는 해외선교현장에서 일하는 사명자들이 현지생활 속에서 현지인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생활인의 모습은 사명자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일까? 정말 이런 이들의 삶은 선교사로서 부적절한 것일까? 반드시 유능한 성경교사가 되어 현지인을 위한 교회를 개척하거나 신학교를 세워 섬기는 일만 선교사역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


참으로 한국교회는 해외선교현장에서 사명자들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이 서로가 서로를 철저하게 신뢰함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분업화가 이루어지도록 지원해야 한다. 단체를 따지지 말고, 교회를 따지지 말고, 같은 해외선교현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사명자들이 서로 하나의 네트웍을 이루어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 각자의 재능과 실력에 따라 자유롭게 현지인들을 섬길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되어져야 한다.


대체적으로 창의적 접근지역으로 분류되는 지역에서 일하는 사명자일수록 지나치게 서로를 경계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보안을 빙자한 경계가 안타깝게 여겨질 때도 많다. 만일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며, 자신의 달란트로 협력을 도모하면 더 풍성한 사역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만능을 추구하느라고 온 총력을 드려 지쳐가는 모습이 너무 안쓰럽기도 했다. 절대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여겨지기에 더욱 마음이 안타깝기도 했다.


해외선교현장에서 살면서 가장 효과적인 정보교환은 서로가 서로를 더욱 공고히 보호해주는 진정한 보호막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도하고 지나치게 다른 이들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는 격리주의야 말로 사탄의 책략에 걸려들기 쉬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파송한 해외선교현장의 사명자들도 사회가 다양하게 변하는 것처럼, 그래서 일의 분업화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선교현장에서도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모든 해외선교 사명자들에게 유능한 성경교사가 되어 교회를 개척하거나 신학교를 세우는 것을 기대하게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여 현지인을 자유롭게 섬길 수 있는 여건과 풍토가 조성되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협력하는 풍토를 이루도록 밀어주어야 한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해외선교현장을 더 잘 섬기는 비결이 됨을 알아야 한다.


진심으로 한국교회에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것은 해외선교현장에 대한 폭 넓은 이해에 근거하여 선교현장에서 살아가는 사명자들과 원만한 유대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선교현장에서 사명자들이 서로 신뢰하며 하나의 큰 네트웍이라는 밑그림을 그려갈 수 있도록 전적 신뢰로 가장 강력한 후견자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할 뿐이다.


한국교회는 단기선교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선교현장을 자주 방문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대부분이 선교현장에서 행하는 일들은 긍정적인 경우보다는 부정적인 경우가 더 많다. 이는 그동안 한국교회가 선교현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데서 오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해외선교현장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했더라면 피할 수 있었던 부작용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제 한국교회는 해외선교현장에 사명자를 파송하면서 그들에게 어떤 얕은 이벤트성 활동을 기대하거나, 당장의 효과를 전시적인 일에 대한 선호도를 땅에 내려 놓아야 한다. 그리고 선교현장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며, 현지사정에 맞도록 선교현장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명자들이 서로 협력하여 일을 나눔으로 분업화되는 일을 촉진시키는 일에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2007. 10. 25 (목)


글/ 불꽃 石一進


텔레반에게 피납된 지체들의 안전귀환을 기도하며


이 글은 중국 관련 카페를 운영하는 石一進님의 글입니다.
원문은 http://cafe.daum.net/MyLoveChina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저자의 허락 하에 글을 게시합니다.

오늘로 아프카니스탄에서 한국인 23명의 피납사태가 발생한지 열 이틀 째이다. 인질로 붙들린 그들을 구명하기 위해 우리나라 정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그들을 피납한 텔레반과의 협상이 순조롭지 못한 모양이다. 몇 번의 줄다리기가 진행되는 동안에 우리나라 인질들 중에 한 분이 살해당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터넷을 통해 이번 피납사태를 알게된 이래로 오늘까지 열 이틀동안 내 마음은 몹시 착잡하고 괴로웠다.

인터넷에서는 이번 사태로 인해 온갖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표현하는 등의 이른 바 악필들이 그 대부분이다. 차마 읽기 거북스러울 정도로 저속한 표현들로 도배한 것 같다. 아무리 보이지 않는 가상공간이라 할지라도 너무한 것 같다. 무책임하게 써 내려가는 글의 폭력 앞에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안타깝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 것일까? 실로 마음이 착잡하고 괴로워 답답하기만 하다.


세계의 언론은 우리나라의 해외선교 방법을 비판하고 나선 듯 하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출발점은 숭고하다고 인정하면서, 이슬람 원리주의가 활개치는 지역으로 신도들을 보낸 것은 맹목적인 종교활동이자 현명치 못한 결정이었다고 비판한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지난 해 여름에도 한국정부의 반복된 경고와 설득을 외면, 무시한 채 많은 한국인 신도들이 대규모 종교활동을 벌리려다 아프가니스탄 당국에 의해 강제 추방된 사건이 있었음을 상기시키면서 한국교회의 무분별한 해외선교 방법을 비판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텔레반에 의해 납치된 곳은 카불에서 칸다하르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 이 길은 죽음의 도로로 불려진다고 한다. 많은 외국인들이 그 길을 지나다가 수시로 출몰하는 텔레반 무장세력에 의해 납치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란다. 따라서 그 길을 부득이하게 지나고자 할 때는 반드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안전수칙은 ‘아침에 출발하라’는 것이란다. 그런데 이번에 피납된 이들은 이런 가장 기본적인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는 아쉬움을 남겼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에는 위험하고 불안한 곳이 너무 많다. 아프가니스탄 이외에도 도처에서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간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신앙과 사상, 그리고 이념으로 인한 분쟁도 치열하다. 참으로 불안전지대가 너무 많다. 이런 지역의 방문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위험한 지역의 방문은 그에 따른 대책을 세워야 한다. 위급상황에서 최소한 자기방어를 위한 훈련은 필수조건일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사태는 어떤 대책도 세워지지 않은 무방비한 상태에서 당하게 된 당연한 결과로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세계 언론의 지적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번 피납사태는 신도들의 관리를 소홀히 여긴 한국교회가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도 있다. 그동안 한국교회의 피상적인 종교활동의 어리석음을 뉘우치며 반복된 일이 발생되지 않도록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이번 피납사태로 말미암아 한국교회의 일반 신도들이 받을 충격을 생각하며 일의 계획이 치밀하지 못한 작은 소홀로 말미암아 가져온 엄청난 결과를 크게 우려하기도 한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이러한 사태의 모든 책임을 통감해야 할 것이라고 요구한다.


참으로 이번 피납사건은 한국교회의 복음주의적 선교열망을 다시 한번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세계언론의 시각이다. 한국교회는 이미 고 김선일씨 사건으로 인해 무분별한 해외선교가 가져다 주는 위험성에 대한 경고를 받은 바가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한국교회의 해외선교 방법론에 대하여 다소 회의적인 반응을 드러내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전체 세계언론이 바라보는 경향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극히 부분적인 시각일 수 있다. 그래도 한국교회는 그들의 비판이나 질책을 겸허하게 받아들일줄 알아야 한다.


미국의 한 언론은 수만 개의 교회가 있는 한국교회의 복음주의적 활동에 불행한 면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경쟁의 과열이라는 지적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세상의 주목을 받기 위해 새로운 곳이나 위험한 곳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더 많은 명성과 돈으로 이어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아냥거린다. 결국 이번 피납사태도 이와 같은 한국교회의 병리적 선교형태가 가져온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는 것이 미국의 한 언론이 보는 시각이다.


지금은 이번 피납사태가 어디서부터, 왜 일어난 사태인지에 대하여 시시비비 따질 때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피납된 이들이 무사히 귀환할 것인가에 총력을 다해야 할 때이다. 그러므로 사건의 진상을 시시비비 따져 밝히며 누구에겐가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사태가 안전하게 해결된 후에 언급되어도 늦지 않는다. 따라서 그 전에는 좋든, 나쁘든 서로가 말을 아껴 비판을 삼가야 한다. 오히려 침묵 가운데 협상자들로 하여금 협상이 잘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어떻든 피납된 이들이 무사히 풀려나는 것이 최고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마음을 연합하여 기도하며 조용히 사태의 결과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지켜보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마음이 조급하고 불안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이번 일을 어떻게 풀어가실 것인지를 인내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왜 위험한 지역에, 그것도 정부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들을 보냈느냐는 책임론을 앞세워 비난하거나 비판하는 일을 삼가고, 어떤 경우에도 이번 사태로 인해 누군가를 원망하는 일도 삼가야 한다.


최근에 인터넷으로 접하는 소식들은 설왕설래다. 종잡을 수 없는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다. 어느 보도를 믿어야 할지 난감하게 여겨진다. 하루에도 몇 번씩 줄다리기가 반복되는 그런 느낌 속에, 순간순간 엊갈리는 소식들 뿐이다. 한국인이 피납되었는데도 우리가 언론을 통해 전해 들을 수 있는 소식들은 외국의 통신사들이 무책임하게 흘리는 정보에 의존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시시각각 피납된 이들의 생명이 풍전등화인 것만 같아 마음이 초조해지고 있다.


우리는 이번 사태에 피납된 한 사람이 결국은 텔레반에 의해 피살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피납자 중에 두 여인의 육성으로 그들이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는지를 가름할 수 있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그들은 모두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운 공포 속에서 심신이 몹시 지쳐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저 막연하게 자기들을 빨리 구해달라고 요청하는 작은 부르짖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 모두는 또 다른 희생자가 생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사태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침착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텔레반의 고도 심리술에 말려들어 일이 더욱 힘겹게 될 수 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아프가니스탄에 대통령 특사를 긴급 파견한 우리나라 정부 관리와 아프가니스탄 정부 당국자들의 협상에 기대감을 가져야 한다. 예상했던 일의 진척이 지지부진할지라도, 끝까지 인내로 더 이상의 인명이 살해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고 피해없이 모두가 안전하게 풀려나오기를 기도하며 기다려야 한다.


이번 사건으로 한 사람이 피살되었다. 우리는 그가 왜 피살되었는지 자세한 내막을 모른다. 그가 목사라는 사실과 한민족복지재단 아프칸봉사단의 단장으로 이번 한국인들의 인솔자라는 사실만 알고 있다. 따라서 그의 죽음에 대한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따라서 아직은 그의 죽음에 대한 평가는 성급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부 한국교회는 그를 순교자로 성급하게 추앙하고 있다. 어떤 이는 우리나라 선교초기에 대동강변에 피를 뿌렸던 토마스 선교사에 비견하여 그를 아프칸의 토마스 선교사라고 칭송하기도 한다.


선교(宣敎)와 봉사((奉仕)란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하여 연세 한국어 전자사전에서는 ‘선교’란 ‘종교를 전하여 널리 퍼뜨리는 것’이며, ‘봉사’란 ‘남을 위하여 자신의 이해를 돌보지 않고 애써 일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민족복지재단 아프칸봉사단이 아프카니스탄에서 활동한 성격은 무엇일까? 선교활동이었는가, 아니면 봉사활동이었는가? 그들의 활동성격이 선교가 목적이었다면 앞서 살해된 분의 죽음은 순교라함이 타당하다. 그는 분명히 선교를 위해 아프카니스탄을 방문하였으며, 그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던 중에 텔레반에 의해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민족복지재단 대표는 기자회견을 통하여 ‘그들이 아프카니스탄에서 활동한 목적은 기독교의 선교가 목적이 아니다. 순수한 봉사가 목적이었다’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한민족복지재단은 스스로 기독교 선교기관이 아니라 순수한 국제적인 봉사를 위한 국제 NGO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봉사단체라고 강변한 것이다. 그는 계속하여 ‘아프가니스탄에는 기독교 선교기관은 하나도 없다. 오직 NGO로서 국제봉사단체만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단다. 그렇다면 앞서 살해된 분의 죽음을 선교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자기가 해야 할 일에 충실하다가 변을 당하여 죽게 된 이들에게 ‘순직했다’는 말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국제봉사기관으로서 한민족복지재단 아프칸봉사단의 단장으로 아프칸 봉사할동 중에 변을 당하여 죽임을 당한 그는 순직자라고 함이 타당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그를 순교자 운운하면서, 그가 아프카니스탄에서 흘린 피는 그 땅에서 복음의 기초가 될 것이라고 성급하게 추앙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직은 이번 피납사태로 목숨을 잃어 버린 분에 대하여 순교자라거나 순직자라는 이름으로 추모하는 일은 시기상조이다. 한국교회가 그를 순교자로 추앙하게 된다면 아직 해결짓지 못한 사태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좀더 조용히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한다. 사태의 추이가 어떻게 해결될 것인지 해결의 실마리가 풀려지기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도리라고 여겨진다.


언제부터인지 자세하게 가름할 수는 없지만, 한국교회에는 해마다 휴가기간이면 단기선교라는 명분으로 짧게는 일 주일에서, 한 달 미만의 해외원정을 떠나는 일로 붐을 이루고 있다. 특히 선교학적으로 창의적 접근지역이라고 분류되는 위험한 지역에도 무분별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많은 해외원정대를 ‘단기선교’ ‘미션트립’ ‘비전트립’등을 명분으로 파송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들이 해외 현지에서 내세우는 명분의 대부분은 ‘봉사’임을 주장하고 있다.


앞에서 사전적인 설명을 했거니와 ‘선교’와 ‘봉사’는 동일한 의미가 아니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단기선교라는 명분으로 지원자를 모아 해외원정대로 ‘단기 선교사’로 파송하면서 해외의 현지에서는 ‘순수 국제봉사단’이라고 강변하는 이중적인 태도는 신실하지 못한 태도이다. 이것은 처해진 상황에 얼마든지 변신할 수 있는 카멜레온 전략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결과가 해외의 현지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되면 ‘기독교 선교단체’가 아니라 ‘순수한 봉사단체’라고 강변하기에 바쁘고, 아무 문제없이 무사히 귀국하면 ‘성공적인 단기선교를 하고 돌아 왔다’고 자화자찬을 아끼지 않는 모순된 일을 자행하게 되는 것이다.  


선교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해외원정은 무조건 복음을 전하는 선교라는 발상은 바르다고 할 수 없다. 해외봉사와 해외선교를 동일한 이해로 받아들이는 일은 위험한 일이다. 선교는 틀림없는 복음의 전도가 목적이어야 하며, 봉사라 할 경우에는 선교가 목적인 봉사인지, 단순한 봉사인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봉사를 선교와 결부시키는 일은 어떤 면에서 이율배반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될 수 있음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교회에 붐을 이루고 있는 일 주일이나 한 달 미만의 짧은 선교지 방문을 굳이 해외 단기선교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의 단기원정이 해외의 선교일선에서 일하는 사명자들의 사역을 증진시키는 기회가 된다고 여기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묵묵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일하는 이들에게 누를 끼치는 해악이 되고 있는 경우가 너무 많이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왜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며 단기선교라는 명분의 해외원정에 목숨을 걸고 있는 것처럼 비쳐지는 것일까?


마음이 몹시 착잡하고 괴롭다. 한국교회의 단기선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암담하게 여겨질 때가 너무 많다. 좀더 치밀한 선교전략 가운데 은밀한 중에 조용히 일하는 모습이 아쉽다. 세계교회에서 미국교회 다음으로 다른 나라에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선교대국이라고 자화자찬하기 이전에, 참된 선교정책과 선교전략이 세워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선교지에서의 위기관리 능력이 부끄럽게도 ‘0’에 가까운 수준인 한국교회의 실상을 보면 너무 속상하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이해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능력이 아직은 미숙하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다.


우리나라에도 불과 120여 년에는 조선민족의 마음 문은 꽁꽁 얼어 붙어 있는 상태였다. 이 때 우리민족을 섬기기 위해 청춘의 몸을 불태웠던 벽안의 선교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나라에서 배우자와 자식을 잃거나 부모를 잃어 우리나라 땅에 묻으면서 그저 말없이 수고하며 눈물 뿌려 일했던 사실을 우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들의 수고와 헌신은 요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말없이 조선민족들에게 빛이 되었고, 소금이 될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교회는 어떤가? 너무 요란하게 떠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의 비전과 욕망까지도 마치 주님의 것인양 간주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떼를 쓰고 있는 모습은 아닐까?


이제라도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자중하는 것이 아닐까? 조용히 주님 앞에 침묵하며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이번에 일어난 아프가니스탄의 피납사태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그들 모두가 안전하게 풀려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하고 있다. 정말 우리는 이번 사태가 어떤 결과로 끝나게 될지 모르고 있다. 우리는 피납된 두 명의 여인들이 들려준 목소리를 들었다. 언제 죽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 빨리 자기들을 구해달라고 호소하는 음성을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모두의 마음이 아프고 답답할지라도, 그들이 처한 환경을 생각하면 가슴이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지는 아픔을 느낄지라도, 그렇지만 어찌하랴. 그러므로 더 이상은 너무 시끄럽게 굴지 말아야 한다. 이번 사태에서 죽임을 당한 이가 순교자로 추앙되든, 순직자로 추앙되든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 일로 너무 시끄러우면 오히려 텔레반을 자극하는 일은 되지 않을까?


조금만 참자. 그대신 주님 앞에 조용히 엎드리자.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바르게 분별하기 위해 침묵하며 주님의 마음을 느끼기 위해 힘 쓰자. 주님께서 이번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이시는 것인지가 중요하지 않은가! 이제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주님의 뜻을 구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기도하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일일 뿐이다. 기다리자. 주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오, 주여! 텔레반에게 억류된 우리 지체들을 도우소서. 그들을 구원하옵소서. 그들의 생명을 보호해 주옵소서. 그들에게 주님께 더욱 충성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만 더 허락해 주옵소서.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주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역사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07. 6. 30 (월)


글/
불꽃 石一進

배우자를 위한 구체적 기도를 멈춰라?!

배우자를 위한 구체적인 기도에는 내 욕심이 들어가기 쉽다. 금주 로또복권의 번호를 구체적으로 알려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돈벌이의 수단으로 복권의 행운을 기대하는 자체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부동산 투기가 크리스천에게 합당하지 않은 일인데도 몇 평짜리 아파트를 달라고, 혹은 이번에 어느 신도시에 한 채 더 당첨되게 해 달라고 구체적으로 기도하곤 한다.


1.
우리는 가끔 어떤 말이나 교훈에 대해 성경보다도 더 권위있고 신빙성 있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마음에 담아두고 명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말들은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떠돌아다니는 것도 있고, 명저자의 글귀, 노래가사 등도 있다. 예컨대 ‘휴거’라는 단어가 성경에 있는 것으로 알고 그 단어 자체에 신비한 느낌을 가지거나, 마가나 누가가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인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말들 중 하나가 “배우자에 관한 기도는 구체적으로 하라”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나는 이 말에 반대한다. 여러 이유로 이렇게 가르치는 분들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말이 다소 인본주의적이고 성경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개인적 견해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주변에서 보면 배우자 기도가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간증을 듣게 되는 경우가 간혹 있다. 어떤 여자는 배우자의 키와 몸무게까지 기도를 했는데 그조차도 응답을 받았다고 놀라워했다. 그런 간증은 나름대로 귀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나… 미안하지만 이런 이들은 신앙이 아직 어린 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위의 응답 받았다는 여자도 준수한 키와 몸무게를 구해서 응답 받았다고 했는데, 이처럼 어떤 여자든지 아마 모르긴 해도 키 162에 95킬로의 남자를 놓고 기도하진 않을 것 같다. 알다시피 세상의 거의 모든 남자들은 오차범위 내에서 비슷비슷한 키와 몸무게의 여자를 원한다. 여자들도 남자의 경제력이나 키 등에 집착한다. 그러면 다들 비슷한 기도를 하게 될 것이고, 이거야말로 축구에서 상대팀에도 기도하는 선수와 어머니가 있는데 우리 팀이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애매한 일이다(이럴 때는 하나님도 “에이, 모르겠다. 니들 맘대로 차라”고 하셔서 실력 있는 팀이 이기는 거라던가?).
장애인과 결혼해서 헌신적으로 살아가는 귀한 사람들이 있다. 이 분들은 어떻게 기도했을까. 감히 추측해 보건대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구체적이든 막연하게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좋은 배우자’를 위해 기도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다. 하나님은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한 부족한 자녀를 위해 그들을 예비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결정은 어떠해야 할까.





2.
내 예전 직장 선배는 결혼과 동시에 해외에 나가는 것이 오랜 꿈이었는데, 마침 미국 어느 곳의 지사에서 근무하게 될 남자를 만나서 기도가 이루어졌다고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은 그런 조건을 바라며 찾은 신랑과 함께 유학을 갔는데 몇 년 후 이혼을 하게 됐다. 알고 보니 미국에 가는 조건 외에는 너무나 형편없는 남자였고, 비상식적인 시댁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녀는, 미국에 가려고만 했지 신중함이 없었던 결정에 대해 후회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신체적 금전적 조건이 아니고 성품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어떨까. 물론 가능하다. 하지만 기도로 그렇게 딱 맞는 사람을 데려다 주시거나 주변 후보들의 성격이 돌연 바뀔까? 그럼 맞는다는 의미는 또 무엇일까. 거의 모든 사람들은 신중하게 고르고 골라서 배우자를 선택한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문제를 만나고, 너무 안 맞아서 도저히 못살겠다고 한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잘 할 것처럼 생각하지만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누구나 단점이 있고 결혼으로 하나님이 맺어주신 이유는 서로 보완하며 잘 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배우자도 일종의 달성목표이거나 도달해야 할 타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일단 누군가를 찍으면 ‘저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며 그 주변을 일곱 바퀴 돌아 무너뜨리려 한다.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라는 말에 너무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삭도 야곱도 룻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예비된 배우자인 리브가와 라헬과 보아스를 만났다.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오랫동안 종살이를 하고 고난을 겪으며 ‘아내 쟁취’의 목표를 향해 달려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유별난 성품을 연단 받은 것이다. 배우자의 조건을 골라서 내 입맛에 맞추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으려니와 옳지 않은 생각이다. 내가 변화받고 연단받아 하나님과 사람 앞에 합당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이다. 결혼은 자기의 꿈을 이루는 도구가 아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하듯 결혼도 두 사람이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통로가 돼야 한다.

3.
유대인들은 기도와 눈물로 오랜 기간 메시아를 기다렸다. 지금도 그러고 있다. 그들은, 예언된 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고, 다윗의 혈통이어야 하고, 세상의 왕으로 정치적 능력을 지녀야 하고… 이런 구체적인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메시아를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모든 예언은 물론 수백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진정한 메시아였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영안이 없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진정한 신랑이었건만, 그들은 구체적인 조건들을 따지면서 예수님이 진정한 의미의 유대인의 왕임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저 선한 것이 나올 리 없다고 믿는 나사렛 땅의 목수로만 여겼으며,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그의 외모와 조건에 마음을 닫아 버렸다. 그 결과 그들은 폭도가 되어 하나님의 독생자인 메시아를 죽이고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른 민족이 되고 말았다. 그들의 영적으로 강퍅한 마음은 끝내 세상의 왕이며 정치적 해결사인 마지막 때의 적그리스도에게 환호를 보내는 최악의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배우자도 본인이 거부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 대가는 고스란히 자신의 몫이 된다. 구체적 조건 너머에 있는 가능성과 눈에 보이는 상황 너머에 있는 잠재성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4.
배우자를 위한 구체적인 기도에는 내 욕심이 들어가기 쉽다. 금주 로또복권의 번호를 구체적으로 알려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돈벌이의 수단으로 복권의 행운을 기대하는 자체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부동산 투기가 크리스천에게 합당하지 않은 일인데도 몇 평짜리 아파트를 달라고, 혹은 이번에 어느 신도시에 한 채 더 당첨되게 해 달라고 구체적으로 기도하곤 한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에도 응답하실 때가 있다. 그들의 수준에 맞는 은혜를 주신 것이다. 콜라가 해롭다는 걸 알면서도 가끔은 어쩔 수 없이 사주게 되는 것이 부모이다. 그럴 때면 아이들은 우리 엄마 최고하며 고마워 하겠지만, 부모는 아이가 맛 없어도 몸에 좋은 밥이나 야채도 잘 먹고 튼튼한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언젠가 깨달을 날을 기다리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응답을 해 주시지만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기도는 모든 것을 다 맡기며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기도이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믿는다면, 늘 가장 좋은 것으로 채우길 원하시는 내 아버지라는 것을 안다면, 적당한 때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주님 보시기에 좋은’ 배우자를 주실 것으로 믿고 다 맡기라.


예수님도 정말 피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당신이 원하시는 길이 있었지만,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길 원한다고’ 기도하셨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결혼은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성도들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신부로 인정하실 때 우리의 조건을 보고 택하지 않으셨다. 아마 조건을 따지기 시작했다면 누구도 쉽게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거나 구원을 받아 천국혼인잔치에 초대받지 못했을 것이다. 구원, 즉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은 어떤 조건이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고 값없이 받는 선물이다.

배우자 기도는 꼭 필요하지만, 그 내용은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멋지고 아름답고 성격도 좋은 킹카를 꼭!! 주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내게 꼭 필요한 귀한 사람을 예비하셨다가 보내시면 순종하겠나이다… 예수님처럼 이렇게 기도하라.
‘그런데 기왕이면…’ 하고 끝에 토 달지 말고~



http://story.godpia.com/contents/gisabon.asp?cID=H91&aID=4391&page=1

자존심과 자존감







자존심과 자존감


- 이응도 목사 / 필라델피아 초대 교회



개인적으로 제가 자녀 교육에 있어서 가장 크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자존감’에 대해서입니다. 이것은 자존심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자존감이란 ‘가치’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끼는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과 존재에 대한 자부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살아온 삶과 앞으로 걸어갈 길에 대한 든든한 자부심은 긍정적이고 당당한 자아상을 만들어냅니다. 그 건강한 자아상에 근거하여 살아갈 날들에 대한 밝은 전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우리들은 자존심에 집중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우월을 느끼기를 좋아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다음의 다섯 가지에 근거해서 자존심을 세우려 합니다.

첫째는 ‘소유’입니다. 누가 더 많이 가졌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판단의 근거입니다.

둘째는 ‘성취’입니다. 개인의 삶에 대한 업적 중심의 평가는 유혹적입니다.

셋째는 ‘직책’입니다. 업적과 직책은 사람의 명예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높아지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업적과 명예는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넷째는 ‘외모’입니다. 외모는 현대 문화를 이해하는 열쇠와도 같습니다. 보다 아름답고 섹시한 외모는 다른 사람에 대한 자존심의 근거가 됩니다.

다섯째는 ‘인간 관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소속감을 가지기를 원하고 자신이 맺고 있는 인간 관계를 통해서 자신을 설명하거나 해석하려 합니다. 그 속에서 동질감을 느끼려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상대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얼마든지 변할 수도, 사라질 수도 있는 것들입니다. 자존심에 근거한 자기 평가는 늘 불안할 수 밖에 없고 흔들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자기 가치가 필요합니다. 상담을 하면서 가장 어렵고 힘든 피상담자들은 바로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입니다. 잘못된 삶을 살아도, 자신 때문에 가정에 상처와 아픔이 남아도 자신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비난 받을까 잠시 자존심이 상해서 분노하고 책임을 돌리기도 하지만 결국 다시 무책임하고 질서 없는 삶으로 돌아갑니다. 자기 자신에게 부여한 가치가 낮기 때문에 다시 그런 삶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지도, 부담스러워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한 사람, 한 사람은 참으로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 존재가 충분히 존중 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가치를 잃어버리는 방식으로 살기도 합니다. “우리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지불하고 살만큼 가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가치대로 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가치를 더욱 빛내며 살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과 이 세상에서 참으로 소중한 존재이니까요….


자존감에 대한 정의

자존감이란 개인이 자신의 특성과 능력에 대해 지니고 있는 생각, 판단, 감정 및 기대를 포함하는 개념으로서, 인간 내면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자신에 대한 가치평가이다. 이 자존감에는 두가지 요소가 있는데 하나는 여러 가지 일을 해 낼 수 있다는 자기 능력감이고, 또 하나는 자신이 행복해질 가치가 있다는 자기 가치감이다. 따라서 이 자존감은 우리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행복감을 느끼는 일에 직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부부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대인관계에도 영향을 끼친다.






자존감은 자라면서 가족과 친지, 학교 선생님이나 친구등 주변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형성된다. 즉 자신에게 중요한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이 사랑받고 가치있는 존재임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며, 이것이 자존감 형성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흔히 듣는 말로 사랑받으면서 큰 아이 사랑할 줄 알며 비난받으며 큰 아이 비난밖에 할 줄 모른다는 말은 바로 이 것이다. 비난받으며 큰 사람은 낮은 자존감을 형성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자신이 가치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남을 비난하고 남이 잘못했다고 생각해야 상처를 덜 받고 숨을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자존감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또다른 요인은 사회적 가치관과 성격적인 영향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의 가치가 개인의 지능, 신체적인 매력, 교육, 재력, 권력 그리고 성취도에 따라 좌우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성공의 상징을 소유하면 자존감이 높아지기도 한다.

최덕신 집사 복귀, 하나님의 감격도 생각해야

본 사설은 ‘크리스천 투데이’ 에서 아무런 수정 없이 Copy-Paste했습니다.
2005년 8월 8일자 기사
원본 주소: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oc_1760.htm


최덕신 집사가 최근 ‘최덕신의 주찬양’이라는 카페를 중심으로 소그룹 찬양모임을 시작하고 정기적인 기고도 하고 있어 최덕신 집사의 복귀 가능성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최덕신 집사는 지난해 아내가 간통혐의로 고소, 이를 이유로 모든 찬양 사역을 내려놓은 바 있다.

최덕신 집사의 복귀를 두고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찬반의견이 서로 엇갈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동안 최덕신 집사가 일궈논 교회음악 분야에서 그의 자리가 너무도 크기에 최덕신 집사를 기다리는 기독교인들도 상당수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치명적인 죄과가 있는 자들이 공식석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기독교인은 과거를 통해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그 사람의 미래가치를 인정하는 넓은 사고를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최덕신 집사가 비록 과거의 문제를 안고 있다 해도 그의 진심어린 회개가 뒤따른다면 우리는 최덕신 집사의 사역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일부는 찬양 사역자가 불륜 등의 죄를 저지른데 대해서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자 ‘기독교인에 대한 기롱’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순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미하고 은혜를 전해야할 자가 범죄한 몸으로 기독교인들을 인도했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라는 입장이다. 이 때문에 최덕신 집사는 영원히 사역자의 위치에 세워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죄를 위해 사용된 도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쓰여질 때에 더욱 감격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범죄로 더럽혀진 입술로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은 가증스럽다’는 시각도 있겠으나 ‘비록 과거에는 범죄를 위해 쓰여졌으나 이제는 하나님을 찬미하는데 쓰여진다’는 하나님의 감격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과거지향적 종교가 아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죄과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고 답하셨다. 기독교인이라면 여론에 밀려 함께 돌을 던지는 자가 되지 말고 미래를 통해 최덕신 집사를 바라보는 눈을 가져야 할 것이다.

또한 만일 최덕신 집사가 진정으로 찬양사역을 시작하고자 한다면 그의 과거에 대한 철저한 회개가 있어야 한다. 최덕신 씨는 문제가 된 부인의 글에 대한 명확한 해명을 아직 하지 않고 있으며 어느정도 사실로 밝혀진 과거의 잘못에 대해서도 충분한 고백없이 찬양사역을 시작하려는 모습이 엿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최덕신 집사는 스스로 공인이라는 자의식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며 이에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죄된 모습을 모두 청산하고 철저히 신앙의 본을 보이는 모습으로 거듭나야 하겠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최덕신 집사를 바라보고 있고 최덕신 집사의 삶과 행동들까지도 본 받고 싶어하는 이들이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2008년 8월 7일 수정:
최덕신과 관련된 검색어 입력으로 오시게 된 분들은 꼭 아래의 글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최덕신을 통한 한 없는 축복과 큰 도전 (http://www.wayiam.com/blog/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