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pacting others

교회에서 섬기는 새터민 아이들 중에 한 아이가 고3이다. 이 친구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있다. 아직 한국에 들어온지 1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학이라는 또다른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 마치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넘는 것과 같은 두려움이 이 친구에게 있다. 어제 주일에 마침 지금은 대학생이 된 또다른 새터민과 셋이 던킨에서 커피를 마시며 한 시간 정도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다. 나와 그 대학생 언니되는 친구는 두려움을 없애주기 위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머니의 대학 진학 반대, 학교 선생님에 대한 두려움, 경제적인 여건, 막막한 자신의 미래, 나는 할줄 아는게 아무것도 없다는 마음의 다양한 그물에 얽혀서 도저히 헤어나오지 못할것 같았던 그 친구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실 대학 진학 포기에 대한 문제는 그동안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다할 영향을 내가 주지는 못했는데 대학생 언니와.. 사회 생활을 하는 나의 수많은 경험담과 따뜻한 격려 한마디 한마디가 결국은 포기했었던 대학 진학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도록 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 친구의 두려움은 정말 대단했다. 이야기가 계속될 수록 양파 껍질을 벗기면 새 껍질이 나오듯 또다른 두려움이 튀어나왔다. 심지어는 인터넷을 잘 못하기 때문에 대학교 원서를 쓰는 것까지 이 친구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두려움이었다.

계속되는 주일학교 공과공부 시간에.. 또 어떻게 된 일인지 다른 아이들은 모두 일이 있어서 결국 나랑 이 친구 둘이서만 1:1로 말씀 공부를 하게 되었다. 고린도전서12장 말씀을 함께 나누며 난 나의 중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의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성공담이 아닌 실패담을.. 그 실패를 어떻게 딛고 일어서게 되었는지를.. 너무 감사하게도 이 장시간의 대화를 통해서 이 친구가 바닥 수준이던 자존감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했고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 진학에 도전하기로 결단을 했다. 물론 나는 내가 해줄 수 있는 모든 영역에 있어서 도움이 되려고 한다. 대학 입학과 대학 생활의 멘토링이 될 수도 있고 경제적인 서포트가 될 수도 있겠지.. 이렇게 한 영혼이 변화의 꼬투리가 생기고 삶의 방향이 조금이나마 전환되는 것을 보는 것, 그 가운데 내가 어느 한 부분을 통해 쓰임받는다는 것이 정말 행복하다. 이런 관계를 통해서 이 친구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영생과 천국을 약속받는 그분의 딸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아빠가 되고.. 딸 이름 짓기

2011년 5월 30일은 내가 아빠가 된 날이다.. 작년 가을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그리고 특히 올해 초에 아기가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된 이후부터 아이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 정말 고민 많이 했다. 처음에 난 주희(主喜)라는 이름으로 지어주려 했는데 사람들 반응이 너무 시큰둥하고 특히 아내는 극구 반대를했다. 고등학교때 주희라는 친구가 있어서 주희 하면 그 친구 이미지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ㅠㅠ 그냥 밀어부칠까 하다가 양보를 하고 다른 이름을 또 고민하기 시작했다.

유나 출생등록 직후 주민등록등본

난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 아이 이름을 지을 때 이런 원칙을 갖고 만들어야지 하고 생각했던게 있다. 1) 일단 이름은 무조건 예뻐야 한다. 이름 때문에 놀림거리가 되거나.. 그런 불필요한 상처의 계기를 만들 필요는 없기 때문에.. 2) 그리고 부르기 쉬워야 한다. 한국사람이 부르든 외국인이 부르든 발음이 쉬워야 더 친근감이 생기는것 같다. 3)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경적인 의미와 구체적인 성경 백그라운드가 있어야 한다. 내 신앙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말씀이면 더욱 좋지 않을지..

이런 조건을 갖고 꽤 오래 고심한 끝에 유나라는 이름을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한문으로는 柔娜인데 “부드러울 유”, “아름다울 나”이다. 한문으로 볼 때는 이런 뜻이다..  마음이 온유한 사람, 그리고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 (게다가 외모도 아름다우면 땡큐..ㅎㅎ)

그런데 사실 숨겨진 속뜻은 따로 있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깊이 빠졌던 말씀중에 요12장이 있는데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렸던 부분이다.  요21장도 내게 정말 큰 의미있는 말씀인데 이건 베드로가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만약 나중에 아들이 나오면 요21장에서 이름을 한번 생각해보기로 하고.. 요 12:3 말씀에서 두글자를 따서 유나라는 이름이 나온 것이기도..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요 12:3)

조금 억지 같기도 하지만 유나란 이름은 마리라의 “향 곡 순전한 드”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다. 유나가 이 말씀의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가장 많이 사랑하고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한다.

우리 부모님과 장모님께서 이쁜 이름 여러개를 추천해주셨는데 사실 아빠의 신앙의 큼직한 부분에서 나온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는것 같다.

하늘의 언어

작년 가을 선물로 받았던 김우현 감독이 쓴 하늘의 언어라는 책을 그동안 GPTI 훈련 독서 과제로 미뤄오다가 오늘 1주일만에 다 읽었다. 나 치고는 꽤 빨리 읽었는데 그만큼 내용이 지금까지 내가 선입견이나 고정 관념으로 묶여있던 것들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어서 너무 재미있었다. 방언이라는 것에 대해 나 같은 백그라운드가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거부하거나 하찮게 여길 수 있을것 같은데 여러가지 경험들을 통해 풀어나가는 이 책은 너무 재미있어서 졸려서 눈이 감기기 전에는 손에서 놓기가 어려웠다.

하여튼 결론적으로 김우현 감독님에게 주셨던 방언에 대한 (성경적, 경험적) 통찰력을 이 책을 통해서 나에게도 주신 것이 감사하고 나도 초대 교회 성도처럼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에 대해 진지한 소원을 갖게 되었다. 책의 내용에서 분명히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열정과 지성으로 충만하다고 해도 이 마지막 때의 현실을 돌파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건 분명한것 같다. (책에서 표현한건 다른데… 어딘지 찾기는 힘들고.. 밑줄을 치면서 읽을껄..)

난 방언을 하지 못해서 잘은 모르지만 방언이라는 것이 일종의 현실적, 영적 현실로 부터의 도피처가 되는건 바람직하지 않는것 같다. 책에서 말하는 내용에는 분명 나의 세계관이나 신학에 부대끼는 부분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와는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마음을 열고 진지하게 읽을 수 있었던 것도 역시 GPTI 훈련으로 만들어진 체질 덕분인것 같다.

잘 읽긴 읽었는데 아직은 좀 두려운 구석도 있고.. 과연 내가 기도한다고 책에서 처럼 똑같이 될까 하는 생각도 있고 아직 그런 기도는 하지 않고 있는데 솔직히 책 속에서 김우현 감독님을 통해 방언을 받은 사람들이 부럽긴 하다. 아무튼 김우현 감독님을 통해 주신 방언에 대한 통찰력은 정말 대단하다.

새로운 통일관

(2006. 9. 21. YM목요모임 설교 요약)

우리가 가져야할 통일과 통일 한국에 대한 시각…

통일 후의 통일 한국은 남한의 연장도 아니고 북한의 연장도 아니다. 그렇다고 남한과 북한을 적절히 섞어 놓은 듯한 국가도 아니다.

통일 이후의 한국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이 되어야 한다.

brand new nation. whole new nation..

지금까지 나.. 그리고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통일에 대해서.. 우리가 북한을 거의 흡수하는 방식의 통일.. 그렇기 때문에 통일 한국은 남한의 연장선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박혀 있었던것 같다.

하지만…

19세기 말 일본 제국주의로 부터 시작해서..

미국, 러시아, 일본, 중국… 세계 열강들에 의해서 타의적으로 분단되어 버린 우리가 냉전의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남한’ 또는 ‘북한’… 이 둘 중 하나에 기반한 나라를 통일 한국의 모델로 삼는다면 그건 과거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완전히 새로운 통일 한국을 건설하는 일…

이런 전략으로 통일에 대해 접근한다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건 담대함이다.

우리 자신의 힘을 믿지 않고 갈렙과 여호수아처럼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승리하는…

선교와 문화 인류학 (폴 히버트)

1. 책 소개하기

이 책은 폴 히버트라는 인도 선교사 출신의 저자가 쓴 책이다. 저자는 문화 인류학이라는 학문을 선교에 접목시켜 선교를 함에 있어서 반드시 가져야 할 문화적 측면에서의 통찰력을 전달한다. 특히 저자는 인도에서 사역을 하며 겪어야 했던 실수와 시행 착오를 이 책의 다양한 예제 케이스로 활용하여 읽을 거리를 풍부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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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항 속 인생

사람의 인생은 어항 속 물고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어떤 허름한 식당에 갔는데 그곳에 정말 작고 귀여운 열대어들이 있는 어항이 있었다. 어항이 꽤 컸다. 정말.. 손가락 마디도 안되는 물고기 수십마리가 헤엄치고 있는데 신나서 왔다갔다 하는 애들도 있었고.. 조용히 숨은듯 가만히 있는 애들도..


그 어항을 보면서 어쩌면 사람 인생이 뭔가 대단해보이기도 하고 정말 절망적인것 같기도 하지만 결국 하나님이 보시기에 모두 똑같은 어항 속 물고기..

사람들을 보면 이미 성공해서 승승장구하는 인생도 있고.. 하나님 안에서 좋은 비전을 품고 그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있고, 절망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인생도 있는데.. 어항 밖의 내가 봤을 때 그 물고기들 각자가 얼마나 잘나고 얼마나 못났든 결국은 내가 밥을 주면 먹고 안주면 굶을 수밖에 없는 물고기다. 내가 방의 불을 끄면 물고기는 밤이 되는거고 불을 켜면 낮이 되는거다.. 큰맘 먹고 어항을 청소해주면 더 좋은 환경 더 깨끗한 환경에서 살 수 있는거고 내가 귀찮아서 그냥 가만히 있으면 더러운 물 속에서 힘겹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우리가 어리석어 보일까.. 뭔가 커다란 믿음의 체험을 하고 의기 양양하게 간증을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내가 그냥 손 하나 까딱 해서 굶고 있는 물고기에게 밥을 조금 준 것 뿐인데.. 어항이 너무 더러워서 청소해준 것 뿐인데.. 그러시는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나의 세상은.. 이 넓은 아름다운 지구.. 작년 유라시아대륙 육로여행을 하면서도 느낀거지만.. 그리고 광활한 우주 정말 끝이 없을것 같은 내 인생.. 물고기도 그렇게 느끼겠지..? 크고 넓은 어항, 그럴듯한 수초, 자갈, 때마다 공급되는 먹이, 밝은 조명, 산소를 공급해주는 공기방울까지.. 그것이 my world..이다


다윗이 시편에서 고백했던 수많은 시들.. 사람이 무엇이관대… 이런 마음으로 고백하지 않았을까.. 광야에서 하룻밤 묵기 위해 쳐놓은 천막에 누워서 두려운듯한 눈빛으로 하늘의 별을 쳐다보며 느꼈을 그 경외심 두려움 그리고 무한한 사랑.. 나도 항상 그렇게 살고 싶다. 그래.. 내가 지금 좋은 회사에 다니고.. 좋은 교회에 다니고 좋은 사람도 있다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라고.. 이런 마음이 겸손일까..?

최덕신을 통한 한 없는 축복과 큰 도전

요즘 제 블로그의 referer 기록을 보니 검색 사이트에 “최덕신” 또는 그의 과거 허물과 관련된 원색적인 검색어를 입력해서 나온 결과에 노출된 제 블로그로 오시는 경우가 아직도 많다는걸 알았습니다.

2005년에 등록했던 블로그 글 주소
http://www.wayiam.com/blog/27 (새창)

방문하시는 분들의 검색 의도나 제 블로그에 달린 댓글을 보면 솔직히 안타깝습니다..
아직 우리 사회가 소위 ‘공인’이라는 부류의 사람들에게 너무 특별한 기대를 갖고 있는것 같습니다. 그들이 공인이기 이전에 예수님의 피를 나눈 한 형제라는 사실은 미처 떠올리지 못하는듯.. 그가 중세 수도사가 아닌 이상 우리를 대표해서 율법적으로 죄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만약 그가 정말 같은 가족이었더라면 어땠을지..? 그가 죄를 지었다는것 자체로 인해 그 사람 자체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의 판단은 일단 미뤄둔 채 안타깝게 생각하고 그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감싸주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판단과 정죄는 오직 예수님만이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 조차도 음행중에 잡힌 여인을 정죄하지 않고 죄 없다고 하셨다네요.. 이건 그에게나 저에게나 그리고 모든 분들에게 정말 기쁜 소식이 아닌가요.. (요 8장)

옛날 그에 대한 안좋은 소식이 퍼지기 시작한 것은 그와 관련된 한 분이 게시판에 올린 정말 감정적인 하소연하는 글을 올리고, 네티즌들에 의해서 퍼 날라지면서 부터 입니다. 요즘처럼 실명 인증을 거쳐서 글을 쓰는것도 아니었고 그 글을 쓴 사람이 직접적인 피해자인지 여부도, 그리고 감정섞였던 글이 얼마나 과장되었을지도 전혀 확인되지 않았는데도 일단 그를 매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통제 불가능한 인터넷을 너무 과신하는 것도 좋지 않지만 자기 혼자 읽는것에 그치지 않고 너도 나도 여기 저기 게시물을 퍼 나르면서 오해에 오해가 쌓이게 하는 것도 자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퍼나르기가 계속되어 그 소문은 6-7년이 지난 지금도 인터넷 어딘가에서 떠돌아다니고 새로운 정죄자들을 만들어내고 있는것 같습니다.

전 그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그리고 뮤지션으로서의 활동을 새로 하려고 하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 사회가 복음적으로 순수하게 살아있다면 그가 다시 음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할 때 아무런 판단 없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은 그가 90년대 만들었던 앨범들이나 주찬양 사역들에 한창 바쁠 때 그런 심각한 죄를 범했다는 것에 대해 용납하지 못하는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그럴듯한 곡을 쓰면서 사람들을 속일 수가 있는가..? 하지만 저는 그가 그렇게 아름다운 곡들을 쓸 때에도 마음에 죄악된 본성으로 지배받고 심각한 죄 가운데서 그 곡들을 썼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여전히 죄인이고 하나님을 뜨겁게 예배하고 1시간도 되지 않아 어느새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는 걸 종종 경험합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 죄를 끊임 없이 씻어주고 계시다는 것. 이미 예수님이 그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이제 우리가 비난하는 그의 죄는 존재하지도 않는데 우리만 과거에 얽매여서 용납 못하고 있는건 아닌지… 유교적 백그라운드에서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민족의 성향 같습니다. 정말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90년대 말 대학생이었을 때 주찬양과 최덕신 앨범들을 너무 좋아했던 저로서도 정말 가슴아픈 소식이었지만 사람에 대한 판단은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때와 마찬가지로 제일 좋아하는 주찬양 11집, 갈망, 긍휼 같은 최덕신 개인 앨범도 자주 듣습니다. 우리나라 크리스천 사회에 최덕신이라는 분은 너무나 큰 축복인 동시에 우리가 받아들인 복음에 대한 하나님의 강한 도전이라고 생각되네요. 저는 그를 축복하고 사랑합니다..^^


텔레반에게 피납된 지체들의 안전귀환을 기도하며


이 글은 중국 관련 카페를 운영하는 石一進님의 글입니다.
원문은 http://cafe.daum.net/MyLoveChina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저자의 허락 하에 글을 게시합니다.

오늘로 아프카니스탄에서 한국인 23명의 피납사태가 발생한지 열 이틀 째이다. 인질로 붙들린 그들을 구명하기 위해 우리나라 정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그들을 피납한 텔레반과의 협상이 순조롭지 못한 모양이다. 몇 번의 줄다리기가 진행되는 동안에 우리나라 인질들 중에 한 분이 살해당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터넷을 통해 이번 피납사태를 알게된 이래로 오늘까지 열 이틀동안 내 마음은 몹시 착잡하고 괴로웠다.

인터넷에서는 이번 사태로 인해 온갖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표현하는 등의 이른 바 악필들이 그 대부분이다. 차마 읽기 거북스러울 정도로 저속한 표현들로 도배한 것 같다. 아무리 보이지 않는 가상공간이라 할지라도 너무한 것 같다. 무책임하게 써 내려가는 글의 폭력 앞에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안타깝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 것일까? 실로 마음이 착잡하고 괴로워 답답하기만 하다.


세계의 언론은 우리나라의 해외선교 방법을 비판하고 나선 듯 하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출발점은 숭고하다고 인정하면서, 이슬람 원리주의가 활개치는 지역으로 신도들을 보낸 것은 맹목적인 종교활동이자 현명치 못한 결정이었다고 비판한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지난 해 여름에도 한국정부의 반복된 경고와 설득을 외면, 무시한 채 많은 한국인 신도들이 대규모 종교활동을 벌리려다 아프가니스탄 당국에 의해 강제 추방된 사건이 있었음을 상기시키면서 한국교회의 무분별한 해외선교 방법을 비판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텔레반에 의해 납치된 곳은 카불에서 칸다하르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 이 길은 죽음의 도로로 불려진다고 한다. 많은 외국인들이 그 길을 지나다가 수시로 출몰하는 텔레반 무장세력에 의해 납치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란다. 따라서 그 길을 부득이하게 지나고자 할 때는 반드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안전수칙은 ‘아침에 출발하라’는 것이란다. 그런데 이번에 피납된 이들은 이런 가장 기본적인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는 아쉬움을 남겼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에는 위험하고 불안한 곳이 너무 많다. 아프가니스탄 이외에도 도처에서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간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신앙과 사상, 그리고 이념으로 인한 분쟁도 치열하다. 참으로 불안전지대가 너무 많다. 이런 지역의 방문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위험한 지역의 방문은 그에 따른 대책을 세워야 한다. 위급상황에서 최소한 자기방어를 위한 훈련은 필수조건일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사태는 어떤 대책도 세워지지 않은 무방비한 상태에서 당하게 된 당연한 결과로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세계 언론의 지적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번 피납사태는 신도들의 관리를 소홀히 여긴 한국교회가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도 있다. 그동안 한국교회의 피상적인 종교활동의 어리석음을 뉘우치며 반복된 일이 발생되지 않도록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이번 피납사태로 말미암아 한국교회의 일반 신도들이 받을 충격을 생각하며 일의 계획이 치밀하지 못한 작은 소홀로 말미암아 가져온 엄청난 결과를 크게 우려하기도 한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이러한 사태의 모든 책임을 통감해야 할 것이라고 요구한다.


참으로 이번 피납사건은 한국교회의 복음주의적 선교열망을 다시 한번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세계언론의 시각이다. 한국교회는 이미 고 김선일씨 사건으로 인해 무분별한 해외선교가 가져다 주는 위험성에 대한 경고를 받은 바가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한국교회의 해외선교 방법론에 대하여 다소 회의적인 반응을 드러내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전체 세계언론이 바라보는 경향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극히 부분적인 시각일 수 있다. 그래도 한국교회는 그들의 비판이나 질책을 겸허하게 받아들일줄 알아야 한다.


미국의 한 언론은 수만 개의 교회가 있는 한국교회의 복음주의적 활동에 불행한 면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경쟁의 과열이라는 지적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세상의 주목을 받기 위해 새로운 곳이나 위험한 곳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더 많은 명성과 돈으로 이어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아냥거린다. 결국 이번 피납사태도 이와 같은 한국교회의 병리적 선교형태가 가져온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는 것이 미국의 한 언론이 보는 시각이다.


지금은 이번 피납사태가 어디서부터, 왜 일어난 사태인지에 대하여 시시비비 따질 때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피납된 이들이 무사히 귀환할 것인가에 총력을 다해야 할 때이다. 그러므로 사건의 진상을 시시비비 따져 밝히며 누구에겐가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사태가 안전하게 해결된 후에 언급되어도 늦지 않는다. 따라서 그 전에는 좋든, 나쁘든 서로가 말을 아껴 비판을 삼가야 한다. 오히려 침묵 가운데 협상자들로 하여금 협상이 잘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어떻든 피납된 이들이 무사히 풀려나는 것이 최고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마음을 연합하여 기도하며 조용히 사태의 결과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지켜보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마음이 조급하고 불안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이번 일을 어떻게 풀어가실 것인지를 인내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왜 위험한 지역에, 그것도 정부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들을 보냈느냐는 책임론을 앞세워 비난하거나 비판하는 일을 삼가고, 어떤 경우에도 이번 사태로 인해 누군가를 원망하는 일도 삼가야 한다.


최근에 인터넷으로 접하는 소식들은 설왕설래다. 종잡을 수 없는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다. 어느 보도를 믿어야 할지 난감하게 여겨진다. 하루에도 몇 번씩 줄다리기가 반복되는 그런 느낌 속에, 순간순간 엊갈리는 소식들 뿐이다. 한국인이 피납되었는데도 우리가 언론을 통해 전해 들을 수 있는 소식들은 외국의 통신사들이 무책임하게 흘리는 정보에 의존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시시각각 피납된 이들의 생명이 풍전등화인 것만 같아 마음이 초조해지고 있다.


우리는 이번 사태에 피납된 한 사람이 결국은 텔레반에 의해 피살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피납자 중에 두 여인의 육성으로 그들이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는지를 가름할 수 있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그들은 모두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운 공포 속에서 심신이 몹시 지쳐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저 막연하게 자기들을 빨리 구해달라고 요청하는 작은 부르짖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 모두는 또 다른 희생자가 생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사태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침착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텔레반의 고도 심리술에 말려들어 일이 더욱 힘겹게 될 수 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아프가니스탄에 대통령 특사를 긴급 파견한 우리나라 정부 관리와 아프가니스탄 정부 당국자들의 협상에 기대감을 가져야 한다. 예상했던 일의 진척이 지지부진할지라도, 끝까지 인내로 더 이상의 인명이 살해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고 피해없이 모두가 안전하게 풀려나오기를 기도하며 기다려야 한다.


이번 사건으로 한 사람이 피살되었다. 우리는 그가 왜 피살되었는지 자세한 내막을 모른다. 그가 목사라는 사실과 한민족복지재단 아프칸봉사단의 단장으로 이번 한국인들의 인솔자라는 사실만 알고 있다. 따라서 그의 죽음에 대한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따라서 아직은 그의 죽음에 대한 평가는 성급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부 한국교회는 그를 순교자로 성급하게 추앙하고 있다. 어떤 이는 우리나라 선교초기에 대동강변에 피를 뿌렸던 토마스 선교사에 비견하여 그를 아프칸의 토마스 선교사라고 칭송하기도 한다.


선교(宣敎)와 봉사((奉仕)란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하여 연세 한국어 전자사전에서는 ‘선교’란 ‘종교를 전하여 널리 퍼뜨리는 것’이며, ‘봉사’란 ‘남을 위하여 자신의 이해를 돌보지 않고 애써 일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민족복지재단 아프칸봉사단이 아프카니스탄에서 활동한 성격은 무엇일까? 선교활동이었는가, 아니면 봉사활동이었는가? 그들의 활동성격이 선교가 목적이었다면 앞서 살해된 분의 죽음은 순교라함이 타당하다. 그는 분명히 선교를 위해 아프카니스탄을 방문하였으며, 그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던 중에 텔레반에 의해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민족복지재단 대표는 기자회견을 통하여 ‘그들이 아프카니스탄에서 활동한 목적은 기독교의 선교가 목적이 아니다. 순수한 봉사가 목적이었다’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한민족복지재단은 스스로 기독교 선교기관이 아니라 순수한 국제적인 봉사를 위한 국제 NGO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봉사단체라고 강변한 것이다. 그는 계속하여 ‘아프가니스탄에는 기독교 선교기관은 하나도 없다. 오직 NGO로서 국제봉사단체만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단다. 그렇다면 앞서 살해된 분의 죽음을 선교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자기가 해야 할 일에 충실하다가 변을 당하여 죽게 된 이들에게 ‘순직했다’는 말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국제봉사기관으로서 한민족복지재단 아프칸봉사단의 단장으로 아프칸 봉사할동 중에 변을 당하여 죽임을 당한 그는 순직자라고 함이 타당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그를 순교자 운운하면서, 그가 아프카니스탄에서 흘린 피는 그 땅에서 복음의 기초가 될 것이라고 성급하게 추앙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직은 이번 피납사태로 목숨을 잃어 버린 분에 대하여 순교자라거나 순직자라는 이름으로 추모하는 일은 시기상조이다. 한국교회가 그를 순교자로 추앙하게 된다면 아직 해결짓지 못한 사태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좀더 조용히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한다. 사태의 추이가 어떻게 해결될 것인지 해결의 실마리가 풀려지기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도리라고 여겨진다.


언제부터인지 자세하게 가름할 수는 없지만, 한국교회에는 해마다 휴가기간이면 단기선교라는 명분으로 짧게는 일 주일에서, 한 달 미만의 해외원정을 떠나는 일로 붐을 이루고 있다. 특히 선교학적으로 창의적 접근지역이라고 분류되는 위험한 지역에도 무분별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많은 해외원정대를 ‘단기선교’ ‘미션트립’ ‘비전트립’등을 명분으로 파송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들이 해외 현지에서 내세우는 명분의 대부분은 ‘봉사’임을 주장하고 있다.


앞에서 사전적인 설명을 했거니와 ‘선교’와 ‘봉사’는 동일한 의미가 아니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단기선교라는 명분으로 지원자를 모아 해외원정대로 ‘단기 선교사’로 파송하면서 해외의 현지에서는 ‘순수 국제봉사단’이라고 강변하는 이중적인 태도는 신실하지 못한 태도이다. 이것은 처해진 상황에 얼마든지 변신할 수 있는 카멜레온 전략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결과가 해외의 현지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되면 ‘기독교 선교단체’가 아니라 ‘순수한 봉사단체’라고 강변하기에 바쁘고, 아무 문제없이 무사히 귀국하면 ‘성공적인 단기선교를 하고 돌아 왔다’고 자화자찬을 아끼지 않는 모순된 일을 자행하게 되는 것이다.  


선교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해외원정은 무조건 복음을 전하는 선교라는 발상은 바르다고 할 수 없다. 해외봉사와 해외선교를 동일한 이해로 받아들이는 일은 위험한 일이다. 선교는 틀림없는 복음의 전도가 목적이어야 하며, 봉사라 할 경우에는 선교가 목적인 봉사인지, 단순한 봉사인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봉사를 선교와 결부시키는 일은 어떤 면에서 이율배반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될 수 있음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교회에 붐을 이루고 있는 일 주일이나 한 달 미만의 짧은 선교지 방문을 굳이 해외 단기선교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의 단기원정이 해외의 선교일선에서 일하는 사명자들의 사역을 증진시키는 기회가 된다고 여기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묵묵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일하는 이들에게 누를 끼치는 해악이 되고 있는 경우가 너무 많이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왜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며 단기선교라는 명분의 해외원정에 목숨을 걸고 있는 것처럼 비쳐지는 것일까?


마음이 몹시 착잡하고 괴롭다. 한국교회의 단기선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암담하게 여겨질 때가 너무 많다. 좀더 치밀한 선교전략 가운데 은밀한 중에 조용히 일하는 모습이 아쉽다. 세계교회에서 미국교회 다음으로 다른 나라에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선교대국이라고 자화자찬하기 이전에, 참된 선교정책과 선교전략이 세워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선교지에서의 위기관리 능력이 부끄럽게도 ‘0’에 가까운 수준인 한국교회의 실상을 보면 너무 속상하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이해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능력이 아직은 미숙하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다.


우리나라에도 불과 120여 년에는 조선민족의 마음 문은 꽁꽁 얼어 붙어 있는 상태였다. 이 때 우리민족을 섬기기 위해 청춘의 몸을 불태웠던 벽안의 선교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나라에서 배우자와 자식을 잃거나 부모를 잃어 우리나라 땅에 묻으면서 그저 말없이 수고하며 눈물 뿌려 일했던 사실을 우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들의 수고와 헌신은 요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말없이 조선민족들에게 빛이 되었고, 소금이 될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교회는 어떤가? 너무 요란하게 떠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의 비전과 욕망까지도 마치 주님의 것인양 간주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떼를 쓰고 있는 모습은 아닐까?


이제라도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자중하는 것이 아닐까? 조용히 주님 앞에 침묵하며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이번에 일어난 아프가니스탄의 피납사태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그들 모두가 안전하게 풀려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하고 있다. 정말 우리는 이번 사태가 어떤 결과로 끝나게 될지 모르고 있다. 우리는 피납된 두 명의 여인들이 들려준 목소리를 들었다. 언제 죽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 빨리 자기들을 구해달라고 호소하는 음성을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모두의 마음이 아프고 답답할지라도, 그들이 처한 환경을 생각하면 가슴이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지는 아픔을 느낄지라도, 그렇지만 어찌하랴. 그러므로 더 이상은 너무 시끄럽게 굴지 말아야 한다. 이번 사태에서 죽임을 당한 이가 순교자로 추앙되든, 순직자로 추앙되든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 일로 너무 시끄러우면 오히려 텔레반을 자극하는 일은 되지 않을까?


조금만 참자. 그대신 주님 앞에 조용히 엎드리자.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바르게 분별하기 위해 침묵하며 주님의 마음을 느끼기 위해 힘 쓰자. 주님께서 이번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이시는 것인지가 중요하지 않은가! 이제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주님의 뜻을 구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기도하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일일 뿐이다. 기다리자. 주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오, 주여! 텔레반에게 억류된 우리 지체들을 도우소서. 그들을 구원하옵소서. 그들의 생명을 보호해 주옵소서. 그들에게 주님께 더욱 충성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만 더 허락해 주옵소서.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주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역사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07. 6. 30 (월)


글/
불꽃 石一進

무엇을 신뢰해야될까..?

요 2: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신 첫번째 기적. 바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사건이다. 과연 하인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 묵상을 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없이는 내 이성과 생각을 초월한 신뢰와 순종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인들에겐 어떻게 보면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단순히 물을 떠 오는 것만으로도 예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헌신을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나는 단순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물을 떠오는 정도의 행위로서의 헌신이 아니라 내 남은 인생의 모든 것을 오직 예수님께만 전적으로 맡길 수 있는 정도의 신뢰를 갖고 살아가고 싶다. 이제 어느 정도 나이도 들어가고 평범하게 살아간다면 앞으로의 진로도 어느 정도 결정이 되어 버려서 더 이상 다른 직업을 갖거나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뭔가 큰 꿈을 가질 수도 없게 되어버린 상황이 아닌가 싶다.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할까? 단지 직업이나 결혼, 물질적인 문제들을 떠나서 내 인생이 어떻게 해야만 가치 있게 되고, 천국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이것이 내가 20대를 살면서 가장 많이 고민했던 문제이고 이 고민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2004년에 6개월간 호주를 여행하면서 하나님이 내게 주셨다고 확신하는 호주 원주민 선교의 길을 걷고 싶고 분명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강한 소망이다. 나 스스로도 그 길을 걷고 싶고 내 직업을 통해서도 조금씩 그 준비를 해 나가고 싶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내가 그 길을 걷도록 하실 계획이라면 분명 지금 이 순간도 그 목표를 향한 삶을 살고 있어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저는 작년부터 북사선을 통해 새터민 아이들을 섬기기 시작하고 있고 이것이 당분간은 변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든다. 솔직히 이것이 나에겐 앞으로의 내 인생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왜 한 방향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할 수는 없는지.. 하나님이 과연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모세에게 떨기나무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나서 “너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내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나에게도 그렇게 알아듣게 확실하게 말씀해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이 말씀이 그 하인들에겐 어떻게 들렸을까? 지금 당장 포도주가 떨어지는 사태가 일어났는데 왜 예수님은 나에게 난데없이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실까? 반문하지 않다. 그저 묵묵히 예수님을 신뢰하는 마음 하나로 힘들게 물을 채웠겠지. 그 예수님의 말씀이 지금 나에게 내 삶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과 만남들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 묵상을 통해 새로 깨닫게 된 사실이다. 얼마 전 my utmost for his highest 책에서 소명이란 제목의 QT를 묵상했었는데.. 그 책에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꼭 어느 누군가를 콕 집어놓고 그 사람에게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라디오 전파처럼 모든 이에게 그 부르심의 말씀을 하시지만 그 부르심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전적으로 신뢰하여 그 부르심에 순종하는 사람만이 쓰임받게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작년부터 내가 북사선을 통해 새터민 아이들을 섬기고, 여러 만남들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라디오 전파처럼 나에게 전달되고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하나님은 어느 순간엔가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가 전혀 생각도 못했던 인생을 하게 하실 수도 있지만 지금 현재 나에게 주어진 삶의 방식과 삶의 목표가 아귀까지 물을 채우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영접하고 지금의 삶에 전적으로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 같다.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은 현재 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는데.. 하인들이 그렇게 순종했을 때 결국 연회장도 알지 못했던 포도주의 근원을 알았던 기쁨을 알았듯이 하나님은 분명 나에게도 어느 순간 내 인생을 되돌아봤을 때 내 인생 한 순간, 한 순간에 간섭하셨던 그분의 계획을 깨닫고 기쁨이 충만하게 될 날을 주실 것이라 확신한다.

나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이 보배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7)





전북은행 본사 전주 출장….



전주에서 2박 3일동안 계속되었던 철야 작업 때문에 무지 피곤한 상태에서 기차를 타려고 전주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차역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데…



기차역 하면 가끔 나타나는 사람들… “저기 차비가 모잘라서 그러는데 돔좀 빌려주세요..”



그날 나에게… 정신지체가 있어 보이는 30대 중반 정도의 한 아저씨가 나에게 익산까지 가야되는데 차비가 없으니 돈을 달라고 대뜸 손을 내밀었다.



대합실에서 계속 그 분을 지켜봤는데 당연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무시했다. 그 분이 나에게 와서 돈을 달라고 했을 때 난 당연히 진짜로 익산까지 가려고 하는게 아니라 구걸의 수단인줄로 알았다.. 그래서..



그 분이 돈을 달라 했을 때 난 돈 대신 익산까지 가는 기차표를 직접 사주겠다고 했다. 그러면 난 당연히 그러지 말고 돈으로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정말로 그 아저씨는 익산까지 가는 기차표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내가 타고갈 기차랑 같은 기차인 새마을호를 끊어주려 했지만 새마을호 기본요금 때문에 코앞인 익산까지 요금이 8천원… 그래서.. 30분만 더 기다리시고 통근열차를 타라고 하고선 1200원짜리 익산행 통근열차 기차표를 사드렸다.



무지 좋아하는 그 아저씨.. 당연히 돈을 얻으려는 수작인줄로만 알았는데…



서울로 가는 길에 생각했다.


내가 무언가 큰 능력이 있어야만…


내 상태, 컨디션이 완벽하고 내 부족함이 없을 때에만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건 좋은 핑계거리게 지나지 않았다는걸 하나님이 그 30대 중반의 정신지체를 갖고 있는 아저씨를 통해 나에게 말씀하려고 하신듯….



익산까지 가는 1200원짜리 기차표가 절실했던 아저씨에게 내가 쓴 1200원은 기적이었을 것이다…



내가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고..


내 영적인 갈급함이 채워지지 않는다거나… 내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스스로 나는 훈련되지 않았고 아직은 하나님을 섬기기에 준비되지 않았다고 고백했던 것들…


내 안에 숨겨진 그 ‘기적’을 스스로 투명한 유리 상자 안에 가둬버렸던 것이라는걸 깨닫는다.


나도 믿지 않는 영혼들에게 기적이 될 수 있다…


아니 기적이 되고 있다….^^



“people want me to do everything for them.


but what they don’t realize is they have the power.


you wanna see a miricle, son?


be the miracle.”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 영화 대사 중에서 하나님이 브루스에게 말하는 대사… 영어듣기 연습하던때 수십번을 봤던 영화… 그 중 가장 꽃혔던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