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기준.. 어느것도 지배할 수 없는..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약 3:14-18)


인생을 살면서 피할 수 없는건 사람들과의 부딪침 같다. 가깝던 친구도 어느 순간 적으로 돌변해버리기도 하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시기와 다툼은 늘 존재하는 것 같다. 사람이 항상 자기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최근에 어떤 일을 겪으면서 과연 야고보서의 저 기준이 삶의 어느 영역까지 적용되어야 하는가 고민하게 되었다. 야고보서의 약속대로 행하자니 나 자신이 참 불쌍하고 내 소원대로 행하자니 사람들과의 오해와 시기 상처는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자존감이 우선인지… 아니면 자존감을 죽여가면서까지 눈에 보이는 화평을 추구해야 할지.. 이런 고민은 솔직히 정답이 없는 것 같다. 무엇이 화평케 하는 것인지는 나의 지혜로는 여전히 알 수가 없다.



단 한가지 확실한 것은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둔다는 것.. 어떻게 해야 화평을 추구하는 것인지는 기도로 지혜를 구해야겠다.



인생에 더는 없을 값진 경험을 하게 하시는 그분께 감사드리며…
 

사람을 얻는 인생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 9:19, 개역개정)


바울이 그 인생을 통해 가장 이루고 싶었던 일은 무엇일까?
물론 내가 그 시대에 그와 함께 살아보지 못해서 잘은 모르겠지만 그의 인생 최대의 가치관 중 하나는 분명 ‘사람’이었을것이란 생각이 든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뛰어나고 가장 존귀하고 가장 가치있는 존재인 사람.. 한사람 한사람을 ‘우주’라고 표현해도 좋을만큼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빼다 박은 ‘사람’… 잃어버린 한 영혼이 돌아올 때 천국에서는 잔치가 벌어진다고 하니…



고린도전서 9:19 말씀을 통해 그가 사람을 얻기 위해 스스로 자존심까지도 버렸을 모습이 떠올려진다.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롭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사람을 얻고 더 많은 사람을 구원시키기 위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고백한 바울은 자신의 인생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가장 가치있게 사용한 사람중 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된다.

It was an accident


I am not a perfect person.
But I never meant to do those things to you and the world.
So I have to say before I go that I just want you to know
I’ve found a reason for me to change who I used to be.
The reason is you.

원수까지 감동시키는 삶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삼상 24:6~7a)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



그에게 찾아온..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위기의 순간 또는.. 결정의 순간에 항상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하였을 때 결과적으로는 승리하는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처럼 내 인생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원리는 의외로 간단한 것같다.






삶에서 부딪치는 수많은 문제들. 그 문제들을 놓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순간 순간 하나님이 주시는 한마디 한마디의 작은 말씀들이 결국 나로 하여금 절대로 삶의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는 가장 지혜로운 전략적인 삶.. 멋진 인생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 확신한다.






결국 원수인 사울의 입에서 조차 다윗을 향한 찬사가 흘러나오게 되었다.



다윗의 삶이 결국 승리로 끝나게된 원동력이 이것이 아닐까..?



난… 원수까지도 감동시키는 삶을 살고 싶다.

양심에 대한 재발견(?)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요일 3:21)


사람의 마음에는 누구에게나 양심이 있다.
양심은 내 마음 속의 작은 하나님이라고도 한다.
어떤 일에 대한 판단이 자신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갖게될 수 있는 이유인 것 같다. 물론 자신의 양심이 성경의 가치관대로 올바르게 자리잡아야겠지만…
이 말씀으로 생각할 때 어떤 일이 나의 양심에조차 반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용서와 용납의 하나님을 억지로 끌어들여 자신을 합리화하려고 했던 많은 기억들이 떠오른다.
십자가 복음을 너무 값싼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 예수님은 나의 사소한 죄문제 하나 하나를 위해 그토록 고통당하셨건만…

나를 발견하고 기대하는 2006년

이 글은 여호와앞에 요셉같이 (사랑의교회 중등부 QT책) 2006년 1월호에 실린 원고입니다. 책에 실린 원고는 약간 편집을 거쳤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발견하고 기대하는 2006년




2005년 1 1 0. 저는 송구영신 예배에 혼자 와서 이유 없이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앉아 있었습니다. 몇 가지 계획했던 일들의 실패와 사람과의 관계로부터 받은 실망감, 사회 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부담감 등
어쩌면 그 눈물은 감사와 찬송의 눈물이라기 보다는 그 동안 받았던 상처와 배신감, 부담감으로 고통 받다가 한 순간 아버지 품에 안겨 서럽게 우는 어린아이의 눈물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라는 찬송가 가사가 어찌나 내 마음을 때리던지



 



한 해를 이렇게 우울하게(?) 시작했지만 지난 2005년의 수개월간 양육과 묵상 속에서 조금씩 나의 가치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저에겐 많은 포지션이 있습니다. 사랑의교회 주일학교 교사로서의 나, 대학시절 함께했던 믿음의 친구들 가운데의 나, 9다락방 총무로서의 나, 우리 집 장남으로서의 나, 회사 직원으로서의 나, 어떤 사람을 많이 사랑했던 남자로서의 나, 심지어는 자아도 없이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자처했던 사람으로서의 나 2005년과 그 전에는 라는 존재감을 갖게 할만한 여러 가지 이유와 포지션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저는 이러한 이유들에서 자유하게 되어 어느 누구도, 어떤 과거도 개입하지 않은, 예수님 앞에 발가벗고 서있는 죄인으로서의 나를 다시 한번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와 사회의 여러 가지 타이틀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견되는 모습이 아닌 보이지 않는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찾아가는 나의 모습. 솔직히 말해서 이건 참 어렵습니다. 니모를 찾아서를 보셨다면 이해하실 수 있겠죠. 마지막 장면에 어항 속에 있던 니모의 친구 물고기들이 극적으로 바닷물로 탈출하고 환호하지만 묶여진 비닐봉지 속에 들어있는 자신들의 모습들을 보고선 Now what?! 이라는 마지막 대사를 남기고 영화가 끝나버립니다. 극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구원받아 일단 새로운 영적 세계에 풍덩~ 빠져들었지만 자신의 모습을 확실하게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의 고민 Now what?! 어찌 보면 27살의 어른이 하기엔 많이 늦은 고민이 아닌가 싶고, 주일학교 교사가 어찌하여 이런 고민을 하고 있냐고 손가락질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께 가장 영광이 되는 것인지, 내가 정말 사랑하는 일이 무엇인지, 당장 2, 3년 후에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조차 잘 알지 못하는 27살의 어른은 28살이 되는 2006년에도 예수님과 함께하는 자아 찾기를 계속해야 할 것 같습니다.



 



2006년을 바라보는 이 시점에서 저는 기대에 부풀어 있습니다. 그 동안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나의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고 기쁨 충만할 일, 새롭게 보이실 주님의 계획들을 알게 되어 소망이 가득할 일,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과 학생들, 새로 맺게 될 관계들을 생각할 때 2005년의 시작에 비교하면 극적 반전이라고 표현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렇듯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승리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저는 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