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신뢰해야될까..?

요 2: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신 첫번째 기적. 바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사건이다. 과연 하인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 묵상을 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없이는 내 이성과 생각을 초월한 신뢰와 순종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인들에겐 어떻게 보면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단순히 물을 떠 오는 것만으로도 예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헌신을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나는 단순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물을 떠오는 정도의 행위로서의 헌신이 아니라 내 남은 인생의 모든 것을 오직 예수님께만 전적으로 맡길 수 있는 정도의 신뢰를 갖고 살아가고 싶다. 이제 어느 정도 나이도 들어가고 평범하게 살아간다면 앞으로의 진로도 어느 정도 결정이 되어 버려서 더 이상 다른 직업을 갖거나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뭔가 큰 꿈을 가질 수도 없게 되어버린 상황이 아닌가 싶다.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할까? 단지 직업이나 결혼, 물질적인 문제들을 떠나서 내 인생이 어떻게 해야만 가치 있게 되고, 천국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이것이 내가 20대를 살면서 가장 많이 고민했던 문제이고 이 고민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2004년에 6개월간 호주를 여행하면서 하나님이 내게 주셨다고 확신하는 호주 원주민 선교의 길을 걷고 싶고 분명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강한 소망이다. 나 스스로도 그 길을 걷고 싶고 내 직업을 통해서도 조금씩 그 준비를 해 나가고 싶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내가 그 길을 걷도록 하실 계획이라면 분명 지금 이 순간도 그 목표를 향한 삶을 살고 있어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저는 작년부터 북사선을 통해 새터민 아이들을 섬기기 시작하고 있고 이것이 당분간은 변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든다. 솔직히 이것이 나에겐 앞으로의 내 인생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왜 한 방향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할 수는 없는지.. 하나님이 과연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모세에게 떨기나무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나서 “너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내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나에게도 그렇게 알아듣게 확실하게 말씀해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이 말씀이 그 하인들에겐 어떻게 들렸을까? 지금 당장 포도주가 떨어지는 사태가 일어났는데 왜 예수님은 나에게 난데없이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실까? 반문하지 않다. 그저 묵묵히 예수님을 신뢰하는 마음 하나로 힘들게 물을 채웠겠지. 그 예수님의 말씀이 지금 나에게 내 삶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과 만남들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 묵상을 통해 새로 깨닫게 된 사실이다. 얼마 전 my utmost for his highest 책에서 소명이란 제목의 QT를 묵상했었는데.. 그 책에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꼭 어느 누군가를 콕 집어놓고 그 사람에게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라디오 전파처럼 모든 이에게 그 부르심의 말씀을 하시지만 그 부르심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전적으로 신뢰하여 그 부르심에 순종하는 사람만이 쓰임받게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작년부터 내가 북사선을 통해 새터민 아이들을 섬기고, 여러 만남들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라디오 전파처럼 나에게 전달되고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하나님은 어느 순간엔가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가 전혀 생각도 못했던 인생을 하게 하실 수도 있지만 지금 현재 나에게 주어진 삶의 방식과 삶의 목표가 아귀까지 물을 채우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영접하고 지금의 삶에 전적으로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 같다.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은 현재 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는데.. 하인들이 그렇게 순종했을 때 결국 연회장도 알지 못했던 포도주의 근원을 알았던 기쁨을 알았듯이 하나님은 분명 나에게도 어느 순간 내 인생을 되돌아봤을 때 내 인생 한 순간, 한 순간에 간섭하셨던 그분의 계획을 깨닫고 기쁨이 충만하게 될 날을 주실 것이라 확신한다.

(Lomo) 퇴근길 버스

 

지하철을 타기 싫어서…
시간이 좀 걸리고.. 갈아타야 하지만..
퇴근길엔 항상 버스를 타고 음악을 들으면서
서울 밤풍경을 구경하며 다닌다…

카메라: Lomo LC-A
필름: 코니카 센추리아100

사랑은 본능? 본연의 모습..?

지금까지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지만…

새들은 항상 같은 날개짓으로 난다.

독수리는 날개짓을 거의 하지 않고 날개를 쫙 편 채로 기류를 타고

갈매기는 갈매기 특유의 날개짓이 있다.


갈매기끼리 날개짓을 이렇게 하자고 약속한 것도 아니고,

알에서 깨어나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닌데

갈매기들은 자기들만의 날개짓으로 하늘을 난다.

어느정도 각도로 날개를 꺾고 어느정도 주기로 날개짓을 하는지..

모두가 똑같은 모습..


사람은… 학교나 집에서

이렇게 이렇게 사랑을 하라고 교육받지 않았지만

누구나 거의 비슷한 방법으로 사랑을 느낀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왜 이렇게 똑같은 모습으로 사랑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여행을 하면서 본 갈매기떼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음.. 하나님이 지으신 모습이 이대로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지금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자기가 지음받은 본질대로 사랑을 하고,

아무리 상처가 많아도 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사람인것 같다.


만약, 난 상처가 너무 깊어서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면… 그건 자기가 자기 자신이기를 포기하겠다는 말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이 맞는듯..

人生이 곧 사랑이고…

사랑이 곧 人生이기 때문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 1:26)




2006년 11월 경주 여행중에….

나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이 보배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7)





전북은행 본사 전주 출장….



전주에서 2박 3일동안 계속되었던 철야 작업 때문에 무지 피곤한 상태에서 기차를 타려고 전주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차역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데…



기차역 하면 가끔 나타나는 사람들… “저기 차비가 모잘라서 그러는데 돔좀 빌려주세요..”



그날 나에게… 정신지체가 있어 보이는 30대 중반 정도의 한 아저씨가 나에게 익산까지 가야되는데 차비가 없으니 돈을 달라고 대뜸 손을 내밀었다.



대합실에서 계속 그 분을 지켜봤는데 당연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무시했다. 그 분이 나에게 와서 돈을 달라고 했을 때 난 당연히 진짜로 익산까지 가려고 하는게 아니라 구걸의 수단인줄로 알았다.. 그래서..



그 분이 돈을 달라 했을 때 난 돈 대신 익산까지 가는 기차표를 직접 사주겠다고 했다. 그러면 난 당연히 그러지 말고 돈으로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정말로 그 아저씨는 익산까지 가는 기차표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내가 타고갈 기차랑 같은 기차인 새마을호를 끊어주려 했지만 새마을호 기본요금 때문에 코앞인 익산까지 요금이 8천원… 그래서.. 30분만 더 기다리시고 통근열차를 타라고 하고선 1200원짜리 익산행 통근열차 기차표를 사드렸다.



무지 좋아하는 그 아저씨.. 당연히 돈을 얻으려는 수작인줄로만 알았는데…



서울로 가는 길에 생각했다.


내가 무언가 큰 능력이 있어야만…


내 상태, 컨디션이 완벽하고 내 부족함이 없을 때에만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건 좋은 핑계거리게 지나지 않았다는걸 하나님이 그 30대 중반의 정신지체를 갖고 있는 아저씨를 통해 나에게 말씀하려고 하신듯….



익산까지 가는 1200원짜리 기차표가 절실했던 아저씨에게 내가 쓴 1200원은 기적이었을 것이다…



내가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고..


내 영적인 갈급함이 채워지지 않는다거나… 내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스스로 나는 훈련되지 않았고 아직은 하나님을 섬기기에 준비되지 않았다고 고백했던 것들…


내 안에 숨겨진 그 ‘기적’을 스스로 투명한 유리 상자 안에 가둬버렸던 것이라는걸 깨닫는다.


나도 믿지 않는 영혼들에게 기적이 될 수 있다…


아니 기적이 되고 있다….^^



“people want me to do everything for them.


but what they don’t realize is they have the power.


you wanna see a miricle, son?


be the miracle.”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 영화 대사 중에서 하나님이 브루스에게 말하는 대사… 영어듣기 연습하던때 수십번을 봤던 영화… 그 중 가장 꽃혔던 대사..)

마음문=자동문?

지난 수요일날 MBC라디오 친한친구에서 에픽하이 타블로의 말..

사람의 마음 문이 자동문이었으면 좋겠어요~

다가갔을때 영업중이면 자동으로 열리고..

영업중이 아니면 열리지 않고..

회전문.. 그거 아주 나쁘죠ㅋㅋ

살짝 들어갔다 운나쁘면 다시 나와야되는..


계3:20 말씀이 떠올랐다~

사람의 마음문은 절대 자동문이 아니라는 사실..!

각자의 마음문의 열쇠는 각자가 갖고 있는것 같다.

혹.. 아무리 다가가도 열리지 않는 문이 되어도 어쩔 수 없는건…

그 문의 열쇠는 내가 갖고 있지 않기 때문…

예수님조차도 그 문을 스스로 여실 수가 없다.




 

“Even Jesus Christ can’t get through this closed door
unless you open up.”

2006. 8. Lomo LC-A / Kodak 400 2006 Hyung Gi Song

중등부 단기선교 후기 (벧전 3:8-9)

중등부 단기선교 후기


8월 9일 출발 당일에도 저는 이번 선교를 통해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어떤 일을 이루실지 알지 못했습니다. 팀원 중 유일하게 칼출근을 해야 하는 직장인이었던 까닭에 준비 기간 중 새벽기도하고 아침만 먹고 출근을 해야 했고 마임, 찬양은커녕 간단한 일본어 회화 그리고 영적인 준비도 되지 않은 솔직히 스스로에 대한 적지 않은 실망감을 안고 출발을 했습니다. 출발 당일까지도 아이들 이름을 제대로 외우지 못하고 팀에서 아무런 할 일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제가 붙들었던 말씀은 잠19: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 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2001년 중국 연변 비전 트립을 떠나면서 비슷한 상황에서 의지했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기도 가운데서 분명 하나님은 이번 선교를 통해 내 안에 역사하시고 나를 통해 뜻을 이루시길 원하신다는 믿음과 확신을 갖고 출발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내 머리로는 알지 못하지만 차차 안개가 걷히듯 보여줄 것이라는 확신과 기쁨이 제 안에 있었습니다.


첫째 날 도착 직후 역시 신실하신 하나님은 내가 일본에 왜 왔는지 이유를 알게 하셨습니다. 이혜진 선교사님의 선교 특강을 통해 일본의 근대 기독교 핍박에 대해 알게 되었고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일본 사람의 폐쇄적인 성향, 일본인 친구들을 통해 보아왔던,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신뢰를 주지 않는 그들의 성향에는 극도로 잔인한 일본 근대 기독교 핍박에 그 백그라운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거리의 일본인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나로 하여금 그들의 상처를 깊이 체휼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최근 저는 우리반의 한 학생을 여름수련회에 초청하면서 그 학생에 대한 깊은 긍휼의 마음을 체험했습니다. 그 학생의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났습니다. 처음에는 알지 못했지만 그런 마음이 바로 그 학생이 앞으로 겪게 될 아픔과 상처가 이미 내가 사춘기 때 겪었던 큰 상처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수련회가 끝난 후 기도 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대해서도 본격적인 일정에 앞서 그들이 갖고 있는 아픔과 상처를 먼저 보여주시고 그 아픔을 마음으로 겪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너무 섬세하고 감사했습니다. 바로 ‘상처 입은 치유자 – Wounded Healer’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4박 5일의 일정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습하고 무더운 날씨에 몸이 지치고 길거리에 그냥 쓰러져 잠들고 싶을 정도로 육체적인 한계를 경험했습니다. 4일째 날 한 신사 앞에서 기도할 때에는 아찔한 현기증과 구역질에 귀신이 내 몸을 들락거리며 기도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느껴졌습니다. 10분도 안되는 짧은 기도 속에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승리를 선포하며 평안함을 찾을 수 있었지만 난생 처음 겪는 마귀의 직접적인 공격, 무더운 날씨로 인한 육체의 한계, 모두가 지쳐서 하나되지 못하고 영적 싸움에서 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등은 저에게 마귀의 큰 도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도전에서 결국은 승리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나중에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지만 비전교회 이혜진 선교사님은 저와 같은 캠퍼스 선교단체 출신입니다. 그런 공통점 때문인지 선교사님과의 대화가 즐거웠습니다. 선교사님께서는 그런 대화 중에 저에게 꼭 일본에 와서 사역하라는 말씀을 4-5번에 걸쳐서 하셨습니다. 그냥 지나가는 말이 아닌 진지한 콜링이었습니다. 이미 호주 원주민 자비량 선교에 비전을 갖고 인생의 방향을 그쪽으로 향해서 살고 있던 저에게 일본으로 오라는 진지한 말씀은 나의 남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라는 말이나 다름 없는 말입니다. 당연히 거부감이 들어야 하고, 평소의 저였더라면 두말할 것 없이 정중한 거절의 말이 나왔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저는 그때마다 선교사님 앞에서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일본에 대한 상한 마음을 내 안에 주셨는데 선교사님의 그 요청을 거절할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앞으로의 제 인생을 제가 모든 것을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케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해야 할 곳이 일본이든 호주든, 중국이든 북한이든 오직 하나님이 인도해주시는 대로만 따라가겠다는 다짐을 했을 때 역시 마음에 평안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일본 총리가 광복절에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한 뉴스를 보며 전 이전과는 다른 일본 민족과 그 지도자에 대한 불쌍한 마음으로 다가왔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단기 선교를 통해 내 안에 이루신 성령의 열매로 인한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제는 일본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중보자의 위치에 서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 알게 된 이상 과거 그들이 우리에게 했던 일들이나 현재 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는 시사 이슈들과는 100% 별개로 일본에 대한 상한 마음을 품고 기도하고자 합니다. 한국에 도착한 후 기도를 하며 이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단기 선교를 통해 내 안에 이루신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 받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3:8-9)

열매를 맺기 위한 기본…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7)


오랫동안 열매가 없는 내 삶은 무엇이 문제일까? 오랜 고민이다. 작년쯤부터 들기 시작한 이 생각은 최근에는 깊은 고민이 되었다. 대학교 2학년부터 전도와 제자 양육에 헌신을 했지만 단 한 명의 제자도 세우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분명히 준비되지 못한 점이 있을 것이라 생각을 해왔다.


우리 교회에서 매주 목요일에 열리는 부흥을 위한 연합 기도운동에 갔다. 그 모임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 경건에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벧후 1:5-7) 말씀을 통해 내 마음에 한가지 말씀하신 게 있다. 과연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덕이 되고 있는가? 타인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가… 지금까지 내가 고전 9:19 말씀을 내 인생의 모토로 삼고 사람을 위해 기꺼이 사람의 종이 되겠다고 다짐했었지만 실제 내 삶의 모습은 정말 그렇지가 못한 것 같다.


난 중등부에서 외적으로 볼 때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나 보다. 전도사님은 가끔 나를 공개적으로 칭찬도 하신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나를 책망하는 사람이 없는 환경에서 나는 자신에 대한 착각에 빠진 것 같다.


사도행전 2장에서 보여지는 초대교회 교인들의 모습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는 사랑이다. 지금의 내 모습과는 완전히 반대의 모습이다. 열매 맺기 위해 사람을 붙들고 안간힘쓰지 않아도, 당장 열매가 없다고 낙심하고 고민하지 않아도, 그저 다른 사람에게 나의 모든 것을 오픈하고 하나되어 하나님을 찬양할 때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던 것을 볼 수 있다. 부흥의 기본은 투명한 삶이라고 한다. 사도행전 말씀에서도 열매 맺는 삶의 모습은 투명한 삶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마치 예수님이 제자들과 항상 함께하시며 그 모든 삶을 제자들에게 오픈하셨던 것처럼… 내 삶이 은혜 가운데 투명해지고 사람들에게 숨기고자 하는게 없어질 때가 바로 나로 인해 열매가 풍성하게 열리게 되는 시작점이 되는 것 같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숨기지 않는 삶.. 하나님과 사람에게 동일하게 오픈되는 삶이 바로 내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삶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가을에 1:1 제자 양육을 하려고 마음 두었던 2명의 중등부 아이들과 그 외 모든 우리반 학생들에게 내 삶은 오픈되어 있는가… 내 삶이 그들에게 투명해지지 않고서는 그들이 나를 통해 예수님을 보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는다. 기도중에 성령께서 깨닫게 하신 것들을 위해 기도하고 조금씩 오픈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큰 방향을 잡아야 할 것 같다.

자유의 의미…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눅 7:23)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가 정말 메시아인지 의심하는 마음을 품은 것 같다. 비록 예수님은 요한에 대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분명 요한은 자기가 예상했던 메시아의 이미지와 예수님의 모습이 매치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는듯 하다. 어찌 생각하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자기 뜻에 따라 움직이고자 하는 마음… 기독교 상담학에서 말하는 Manipulate 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었는 듯하다.


오늘 수요 예배에서 사카모토 효부 목사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들으며 내 안에 알지 못했던 큰 죄의 유혹이 있음을 깨달았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신 그 사실… 사람에게는 각자에게 두신 하나님의 너무 크고 아름다운 계획이 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자기 유익을 위해… 욕심을 위해, 아니면 심지어 자기의 사역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manipulate)하려는 유혹이 있다. 나에게도 분명 그런 마음이 있었음을 오늘 수요예배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알게 되었다. ‘자유’라는 말. 너무 쉽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할까…? 세례 요한은 감옥에서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는 시점에서 참 자유함이 있었을까…? 나는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일까…? 나에게 두신 하나님의 계획을 조금씩 알아가는 지금 시점에서 난 지금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자유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을 내 의지와 생각에 따라 manipulate하려고 하는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 반대의 모습들도 발견된다. 자유하지 못하고 타인의 시선에 이용당하고 있는 나의 모습. 나를 하나님의 계획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는 마귀의 교묘한 전술이었음을 깨닫는다.


순간 순간의 여러가지 상황에서… 특히 사람들을 대하고 대화하고 협력하는 상황 속에서 이런 교묘한 유혹을 지혜롭게 분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겠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를 생각하며… (눅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