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라는 암적인 죄문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요21:22)

Os
Guiness의 책 “소명” 중에서 내가 지금까지 얽매여 있었지만 깨닫지 못했던 내 죄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기도를 통해서
해방감을 맛볼 수 있었다. 다른 지체들과의 비교 의식, 그로 부터 오는 얽매임.. 그리고..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내 안에
있는 “질투”라는 암적인 죄 문제를 인정하고 십자가 앞으로 나올 수 있었다..

전통적으로 질투는 일곱가지 큰 죄악 중에서 두 번째로 악하며 두 번째로 만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교만과 같은 육신의 죄가 아닌 영적인 죄이며, ‘냉정하고’, 상당히 ‘모양새 좋은’ 죄다. 이는 탐심과 같이 ‘화끈하고’, ‘보기
흉한’ 육신의 죄와 대조된다. 질투의 독특성은 그 죄를 짓는 자가 결코 즐기지 못하며, 고백하는 경우가 거의 드문 유일한 죄라는
데 있다.

교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현대인은 이 경우에도 질투의 정의를 다르게 내림으로서 고전적인 비난을
회피하려 한다. 어떤 사람이 사업이나 스포츠 등에서 성공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도 성공하길 열망하는 것이 왜 잘못이냐고 말한다.
열망, 경쟁, 우열을 다투는 것은 열린 사회와 자유 시장 경제를 움직이는 추진력이 아닌가?

그러나 질투는 단순히
열망이나 야망이 아니다. 열망과 야망은 건설적인 것이고 소명에서 중심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 이에 비해 질투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명한 정의에 따르면 “다른이가 잘 되는 것에 대해 슬퍼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행복이나 성공을 보면서 우리 자신에 대한 의구심이 들 때 질투가 스며든다. 그러면 우리는 자존감에 상처를 입고 말이나 행동으로 상대방을 우리 수준으로 끌어내리려고 애쓴다. 그들의 성공 때문에 자신이 보잘것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질투심은 우리가 그들을 마땅한 수준으로 끌어내려야한다고 부추긴다. 요컨대, 완전한 질투는 낙담에 비난을 더하고 거기에 파괴를 더한 것이다.

…..”소명” 책에서 15장 중에 나오는 내용

이런 질투라는.. 다른 사람의 인생, 소명과의 비교의식으로 부터 오는 얽매임의 죄 문제에 대해 예수님은 정말 어떻게 보면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한 말씀으로 베드로를 다시 한번 불러 주셨다. 요한복음 마지막 부분에 나온 말씀…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동료 제자 요한과 모르긴 몰라도 비교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던것 같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 정말 어이 없을 정도로
단순하지만 이 단순한 부르심의 음성이 내 안의 죄 문제를 다 드러내고 십자가 앞에 나올 수 밖에 없도록 내 껍데기를 완전히
부숴뜨린 망치질이 된 것 같다. 나 역시 베드로와 똑같이.. 아니 거의 내 영혼을 파괴하다시피 할 정도로 질투와 시기심의 죄는
내 안에 정말 만연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부르심과 사역, 그들 고유의 인격, 모든 것들과의 비교는 정말 쓸데 없는 것
같다. 그 이 중요한 시기에 이런 음성을 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질투라는 암같은 죄문제와 끝까지 싸울 수 있기를.. 그리고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만의 가치와 나만의 목적, 그리고 인생을 살며 추구할 수 있는 꿈과 비전을 주시기를…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한 사람씩 부르신다. 비교는 부질없는 짓이고, 다른 사람에 대한 억측은 시간 낭비이며, 질투는
어리석은 죄악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개별적으로 부름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에게만 책임이 있으며, 그분만을 기쁘시게 해야 하며,
결국에는 그분으로부터만 인정받게 되어 있다.

유라시아 여행 일기 Day 25 – 윌리엄 캐리의 흔적을 찾아..

2008. 5. 16. (금) Day 25

PM 9:10
오늘은 모험을 많이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호텔을 나와 아침을 먹으러 어제 저녁 먹었던 곳에 갔지만 문을 닫았다. 택시를 타고 시티 투어를 한다는 4, Shakespear Sarani로 갔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다시 지하철과 택시를 타고 Willam Carey의 묘지가 있는 Serampore로 가기 위해 기차역에 갔다. 참, Shakespear Sarani에서 인도 사람들이 먹는 대로 노점상 아침을 먹어봤다. 9루피 싼 값에 꽤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 음… 기차역에서는 내일 Varanasi 가는 기차표를 알아보려고 이리저리 다녀봤는데 하나같이 이리 가라 저리 가라… 좀 짜증이 났다. 결국 Varanasi 가는 기차표는 못사고 Serampore 가는 Local train표를 사서 기차에 탔다. 기차는 완벽한 3rd class였다. 에어컨은 당연히 없고, 기차 안에는 물건을 파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한 칸에서 4~5명이 동시에 물건을 팔기도 했다. 보통 인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한 30분을 달려서 Serampore에 도착했다. 인도 사람들은 너무 친절하다. 내가 세람포행 티켓을 들고 있는걸 어느새 봤는지 기차가 역에 다가갈 때 내 옆의 아저씨가 여기가 Serampore라고 했다. 기차에는 방송도 안나오고 역 이름 간판도 스펠링이 Serampore가 아닌 Shirampur…인가.. 아무튼 틀렸다. 일단 Serampore까지 오긴 했는데 이곳 사람들이 윌리엄 캐리를 과연 알긴 할까..? 윌리엄 캐리의 흔적들을 쉽게 찾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싸이클 릭샤 할아버지가 날 불렀다. Willam Careydml 이름과 초상화를 보여주었는데 영어를 잘 못해서… William Carey의 묘지에 가고 싶다는 내 의사가 잘 전달되었는지.. 아무튼 릭샤를 타라고 했다. 릭샤를 타고 또 Local 사람들.. 슈퍼 아저씨와.. 지나가던 한 수녀님과… 이런 분들에게 물어 물어 찾아간 곳은 William Carey가 설립한 Serampore Collage이다.

캠퍼스는 조금 정리 안된 분위기이긴 하지만 세람포어 동네보단 훨씬 정돈된 분위기다. 릭샤 할아버지가 캠퍼스 안의 사람들에게 여러 번 물어봐서 한 기숙사로 갔다. 알고 보니 여기에 이 학교 교수님이자 목사님이신 분이 살고 계셨다. 두 여자 아이들이 있었다. 들어오라고 해서 그 집에 들어가 잠시 기다려 교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 교수님은 날 캠퍼스 안내를 해주시겠다고 제안했다. 날씨가 덥지 않냐고… 살짝 사양했다가 안내를 부탁드렸다.

같이 윌리엄 캐리 박물관으로 갔다. 박물관이 있었다니…! 너무 반가웠다. 비록 방 하나 정도의 넓이의 그다지 넓은 곳은 아니지만 그곳엔 윌리엄 캐리가 쓰던 물건들, 친필 편지와 싸인 등.. 여러가지 흔적들로 가득했고 또 다른 은퇴한 할아버지 교수님이 친이 이것 저것 다 설명을 해주셨다. 박물관 구경을 다 하고 기념품을 샀다. Carey의 열굴과 모토가 쓰여진 학교 휘장과 학교 설립자들의 초상화들… 100루피.

이분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그 교수님과 릭샤를 타고 윌리엄 캐리의 묘지로 갔다. 책에서 보던 그의 모토와 비석에 세겨진 문장. “A wretched poor and helpless worm on thy kind arms I fall.”

아침에 호텔을 나올 때는 과연 Serampore에 제대로 가기는 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하나님께서 너무 좋은 분들을 만나게 해주신 것 같다. 캐리의 묘지에서 다시 그 교수님댁으로 가서 맛있는 차와 과자까지 대접받았다.

Kolkata로 돌아와서도 택시 기사가 날 잘못 내려주는 바람에 우연히 City tour를 발견해서 내일 하루 종일 투어를 할 수 있게 되었고 Varanasi행 기차표도 Tourist Quota 덕분에 어렵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분께 너무 감사하며… 이만 자야겠다.

인도에서의 첫번째 아침 식사는.. 이곳에서 했다..^^

인도에서의 첫번째 아침 식사는.. 이곳에서 했다..^^

아침을 먹고 온 Kolkata 기차역 플랫폼.. 기차 선로에는 X가 가득~

콜카타의 local train 내부 모습.

콜카타의 local train 내부 모습.

세람포어 역에 도착했다.. 영어 스펠링이 내가 알던것과 달라서.. 못내릴뻔했는데 내 옆의 아저씨가 여기가 세람포어라고 해서 내릴 수 있었음.

세람포어 역에서 릭샤를 타고 윌리엄캐리의 묘지로 가고있는 중..

그런데 릭샤 아저씨가 날 데려다준 곳은 윌리엄캐리가 설립한 대학교였다. 고생끝에 마주친 윌리엄캐리의 흉상을 보니 눈물이 날것 같았다..

윌리엄 캐리 박물관.. 이곳의 교수님이 관람객 나 한명을 위해서 문을 열고 에어콘을 켜고 하나하나 다 설명을 해주셨다.

흔적들.

윌리엄캐리가 실제 사용하던 책상.

윌리엄캐리와 가족들이 사용하던 의자

윌리엄캐리의 가계도.

음.. 이건.. 캐리의 결혼 증명서라고 한다. 결혼 증명서란것도 있었구나..

전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윌리엄캐리의 후손들이 이곳에 방문한 적이 있다고... 당시의 기념사진.

캐리가 연구 목적으로 수집한 광물들.

윌리엄캐리의 초상화

박물관에서 하나하나 자세히 모든걸 설명해주셨던 교수님과.. (이 학교에서 수학을 가리치셨는데 지금은 은퇴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맨 왼쪽에 있는 분은 목사님이고.. 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심..

그 목사님과 함께 윌리엄캐리의 묘지로 왔다.

윌리엄 캐리가 묻혀있는 묘지..

윌리엄캐리의 흔적들을 돌아보고.. 다시 콜카타로 가기위해 세람포어 역으로 왔다. 아깐 못봤었던.. 윌리엄캐리의 모토.. 그 아래서 낮잠을 자고 있는 한 인도인..

콜카타에 다시 왔다. 역 앞에서 바라본 풍경..

콜카타 택시

찜통같은 날씨에.. 유일하게 에어콘을 빵빵하게 틀어놓은 곳이 있다. 바로 외국인 여행자를 위한 인도 열차 예약 사무실이다..

기차표 예약을 하고 나왔다. 너무 덥다..ㅡㅡ;

저녁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 발견한 마더 테레사의 초상화

어제 내가 분유와 쌀을 사주었던 아이들과 다시 길거리에서 마주쳤다. 나를 붙잡고.. 또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어제 내가 분유와 쌀을 사주었던 아이들과 다시 길거리에서 마주쳤다. 나를 붙잡고.. 또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유라시아 여행 일기 Day 16 – Seap Reap

2008. 5. 7. (수) Day 16

AM 7:10
그러고 보니 내일이 어버이날이다. 작년엔 집에 있어서 괜찮았는데 이번엔 어찌해야 할지. 빨리 Siem Reap에 도착해서 인터넷으로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아침에 역시 일찍 일어났다. 여행을 하면서 피곤해서 일찍 잠들고 그래서 도 일찍 아침 6시쯤 일어나고 그래서 또 밤에 일찍 자는 생활이 이어지고 있다. 여행을 하면서 미리 사온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잘 하고 있는데 정작 성경은 잘 안 읽고 있다. 집중이 안되어서 잘 안읽힌다. 난 여행하면서 말씀 묵상 정말 많이 할 줄 알았는데…

아침에 체크아웃하고 나와서 근처 식당에서 $3짜리 아침 식사를 했다. 토스트, 주스, 커피, 과일. 비싸다. 커피엔 웬 기름기가 둥둥 떠있어서 마시지도 못했다. 그리고 바로 여행사 앞에 있는 Siem Reap행 버스에 탔다. 짐을 맡기고 자리 안내를 받고.. 마치 비행기 탑승 시스템 같다.

AM 10:55
버스가 한 시골 마을에 멈췄다. 이곳에서 30분 휴식이다. 갈만한 곳이 있나 기웃거리다가 다일 공동체 봉고차를 봤다. 당연히 한국 중고차를 들여와서 스티커를 안떼고 다니겠지 했는데 내리는 분들을 보니 한국 분들이었다. 너무 반가워서 인사했다. 중국에서, 베트남에서, 캄보디아에서 육로 여행을 하면서 거의 교회를 못봤는데 캄보디아에서는 카톨릭 교회도 봤고 Mercy of Jesus Ministry라는 곳도 봤다.

PM 7:50
Siem Reap에서 1박만 하기로 결정했다. 최대한 시간을 절약해서 방콕으로 가야지 금요일날 이란 비자를 신청하고 주말엔 인도행 비행기표를 알아볼 수 있다.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해서 주인인 Rachel의 도움(조언)으로 당일 오후만 앙코르 사원 투어를 하기로 했다. 날 픽업했던 툭툭 기사와 함께 갔다. 사원 입장료가 $20. 예상 이상이다. 하지만 사원 자체는 멋있었다. 이런 규모의 석재 사원을 당시 기술로 어떻게 지을 수 있었을까… 규모가 정말 놀라웠다. 하나 하나 새겨진 문양이나 조각상들은 정말 귀신의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불상이 있고 향이 피어진 곳을 갈 때마다 머리가 아찔했다. 날씨가 더운 건지 영적인 세력이 있는건지… 앙코르 사원을 둘러보며 감탄이 나오기도 했지만 계속 기도하며 둘러봐다.

신앙의 힘은 정말 대단하다. 당시 사람들이 잘못된 신앙의 결과가 이렇게 큰 사원이다. 앙코르와트를 둘러보고 호스텔로 돌아가는데 툭툭 기사가 자꾸 Do you want lady? 라고 물어본다. 좀 짜증이 났다. 그래도 최대한 웃는 얼굴로… 잘 거절하기. 참. 오는 길에 내가 툭툭을 몰아봐도 되냐고 했더니 의외로 흔쾌히 승낙을 받아서 한 5분 정도 툭툭을 운전해봤다. 그래봤자 오토바이지만..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샤워하고 나와서 걷다가 작은 레스토랑에서 캄보디아 음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Cambodian Sour Beef with Rice. 맛있다. 이제 인터넷으로 방콕 정보 습득하고 쉬어야지..

프놈펜에서 시엠립까지 가는 버스.

중간에 잠시 쉬었던 한 시골 마을에서 만난 다일공동체 분들. 장을 보러 오신듯 했다. 그분들이 타고 오셨던 봉고차..^^

버스 안에서는 TV 모니터로 원더걸스 뮤직비디오가 나왔다..ㅎㅎ

호스텔에 체크인한 후... 당일치기로 앙코르와트를 보려고 툭툭을 타고 앙코르와트로 들어가고 있음.

앙코르와트는 문화 유적지이지만 한편으로는 곳곳에 세워진 불상에서 여전히 사람들이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같은 사진인가...?

전통 복장을 입고 관광객들 사진을 같이 찍어주는..

앙코르와트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조각들.

앙코르와트 뒷뜰..?

정문 입구입니다..

곳곳에 숨어있는 불상..

휴.. 이런 조각을 보고 있으면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저녁에 숙소로 돌아오는 길.. 툭툭 기사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툭툭을 운전해봤다..ㅎㅎ

그날의 저녁 식사..

나의 가치는 유용성에 있을까? 관계에 있을까?



나의 가치는.. 유용성에 있을까? 관계에 있을까?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눅 10:19-20)

- ‘My utmost for his highest’ 매일 묵상집 8월 30일자
-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 하나님의 일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추구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예수님의 말씀은 성공적인 사역을 기뻐하지 말고 우리가 주님고 올바르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뻐라하는 것이다. 성공적인 사역을 보고 기뻐하거나 하나님이 당신을 쓰셨다는 사실을 놓고 기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일에 올무가 된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바르게 결속되어 있다면 하나님이 당신을 통해 무엇을 하실는지 도무지 헤아릴 수 없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지속하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입장에 있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날마다 하나님은 당신을 통해 생수의 강물을 쏟으실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이 그것을 모르게 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이다. 당신이 구속과 성결로 하나님과 올바르게 밀착되어 있으면 당신이 어디에 있든지 있는 그곳이 바로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곳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빛 속에서 계속 사는 한, 당신은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서 당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당성시킬 것이다.


오늘날 교회 풍조는 일을 많이 해야 된다는 것이다. 당신이 쓰임을 받을 유용성이 있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독촉하는 사람들을 조심하라. 유용성을 테스트로 삼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가장 크게 실패한 자이다. 성도의 북극성은 하나님 자신이지 유용성의 견적이 아니다. 가치가 있는 것은 우리가 주를 위해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하시는 일이다. 우리 주님이 인간의 삶에서 주목해 보시는 것은 그의 아버지에게 값어치가 될 수 있는 신앙 관계이다. 예수님은 많은 그의 자녀들을 영광으로 인도하신다.

텔레반에게 피납된 지체들의 안전귀환을 기도하며


이 글은 중국 관련 카페를 운영하는 石一進님의 글입니다.
원문은 http://cafe.daum.net/MyLoveChina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저자의 허락 하에 글을 게시합니다.

오늘로 아프카니스탄에서 한국인 23명의 피납사태가 발생한지 열 이틀 째이다. 인질로 붙들린 그들을 구명하기 위해 우리나라 정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그들을 피납한 텔레반과의 협상이 순조롭지 못한 모양이다. 몇 번의 줄다리기가 진행되는 동안에 우리나라 인질들 중에 한 분이 살해당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터넷을 통해 이번 피납사태를 알게된 이래로 오늘까지 열 이틀동안 내 마음은 몹시 착잡하고 괴로웠다.

인터넷에서는 이번 사태로 인해 온갖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표현하는 등의 이른 바 악필들이 그 대부분이다. 차마 읽기 거북스러울 정도로 저속한 표현들로 도배한 것 같다. 아무리 보이지 않는 가상공간이라 할지라도 너무한 것 같다. 무책임하게 써 내려가는 글의 폭력 앞에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안타깝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 것일까? 실로 마음이 착잡하고 괴로워 답답하기만 하다.


세계의 언론은 우리나라의 해외선교 방법을 비판하고 나선 듯 하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출발점은 숭고하다고 인정하면서, 이슬람 원리주의가 활개치는 지역으로 신도들을 보낸 것은 맹목적인 종교활동이자 현명치 못한 결정이었다고 비판한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지난 해 여름에도 한국정부의 반복된 경고와 설득을 외면, 무시한 채 많은 한국인 신도들이 대규모 종교활동을 벌리려다 아프가니스탄 당국에 의해 강제 추방된 사건이 있었음을 상기시키면서 한국교회의 무분별한 해외선교 방법을 비판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텔레반에 의해 납치된 곳은 카불에서 칸다하르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 이 길은 죽음의 도로로 불려진다고 한다. 많은 외국인들이 그 길을 지나다가 수시로 출몰하는 텔레반 무장세력에 의해 납치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란다. 따라서 그 길을 부득이하게 지나고자 할 때는 반드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안전수칙은 ‘아침에 출발하라’는 것이란다. 그런데 이번에 피납된 이들은 이런 가장 기본적인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는 아쉬움을 남겼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에는 위험하고 불안한 곳이 너무 많다. 아프가니스탄 이외에도 도처에서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간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신앙과 사상, 그리고 이념으로 인한 분쟁도 치열하다. 참으로 불안전지대가 너무 많다. 이런 지역의 방문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위험한 지역의 방문은 그에 따른 대책을 세워야 한다. 위급상황에서 최소한 자기방어를 위한 훈련은 필수조건일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사태는 어떤 대책도 세워지지 않은 무방비한 상태에서 당하게 된 당연한 결과로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세계 언론의 지적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번 피납사태는 신도들의 관리를 소홀히 여긴 한국교회가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도 있다. 그동안 한국교회의 피상적인 종교활동의 어리석음을 뉘우치며 반복된 일이 발생되지 않도록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이번 피납사태로 말미암아 한국교회의 일반 신도들이 받을 충격을 생각하며 일의 계획이 치밀하지 못한 작은 소홀로 말미암아 가져온 엄청난 결과를 크게 우려하기도 한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이러한 사태의 모든 책임을 통감해야 할 것이라고 요구한다.


참으로 이번 피납사건은 한국교회의 복음주의적 선교열망을 다시 한번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세계언론의 시각이다. 한국교회는 이미 고 김선일씨 사건으로 인해 무분별한 해외선교가 가져다 주는 위험성에 대한 경고를 받은 바가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한국교회의 해외선교 방법론에 대하여 다소 회의적인 반응을 드러내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전체 세계언론이 바라보는 경향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극히 부분적인 시각일 수 있다. 그래도 한국교회는 그들의 비판이나 질책을 겸허하게 받아들일줄 알아야 한다.


미국의 한 언론은 수만 개의 교회가 있는 한국교회의 복음주의적 활동에 불행한 면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경쟁의 과열이라는 지적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세상의 주목을 받기 위해 새로운 곳이나 위험한 곳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더 많은 명성과 돈으로 이어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아냥거린다. 결국 이번 피납사태도 이와 같은 한국교회의 병리적 선교형태가 가져온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는 것이 미국의 한 언론이 보는 시각이다.


지금은 이번 피납사태가 어디서부터, 왜 일어난 사태인지에 대하여 시시비비 따질 때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피납된 이들이 무사히 귀환할 것인가에 총력을 다해야 할 때이다. 그러므로 사건의 진상을 시시비비 따져 밝히며 누구에겐가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사태가 안전하게 해결된 후에 언급되어도 늦지 않는다. 따라서 그 전에는 좋든, 나쁘든 서로가 말을 아껴 비판을 삼가야 한다. 오히려 침묵 가운데 협상자들로 하여금 협상이 잘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어떻든 피납된 이들이 무사히 풀려나는 것이 최고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마음을 연합하여 기도하며 조용히 사태의 결과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지켜보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마음이 조급하고 불안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이번 일을 어떻게 풀어가실 것인지를 인내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왜 위험한 지역에, 그것도 정부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들을 보냈느냐는 책임론을 앞세워 비난하거나 비판하는 일을 삼가고, 어떤 경우에도 이번 사태로 인해 누군가를 원망하는 일도 삼가야 한다.


최근에 인터넷으로 접하는 소식들은 설왕설래다. 종잡을 수 없는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다. 어느 보도를 믿어야 할지 난감하게 여겨진다. 하루에도 몇 번씩 줄다리기가 반복되는 그런 느낌 속에, 순간순간 엊갈리는 소식들 뿐이다. 한국인이 피납되었는데도 우리가 언론을 통해 전해 들을 수 있는 소식들은 외국의 통신사들이 무책임하게 흘리는 정보에 의존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시시각각 피납된 이들의 생명이 풍전등화인 것만 같아 마음이 초조해지고 있다.


우리는 이번 사태에 피납된 한 사람이 결국은 텔레반에 의해 피살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피납자 중에 두 여인의 육성으로 그들이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는지를 가름할 수 있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그들은 모두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운 공포 속에서 심신이 몹시 지쳐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저 막연하게 자기들을 빨리 구해달라고 요청하는 작은 부르짖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 모두는 또 다른 희생자가 생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사태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침착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텔레반의 고도 심리술에 말려들어 일이 더욱 힘겹게 될 수 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아프가니스탄에 대통령 특사를 긴급 파견한 우리나라 정부 관리와 아프가니스탄 정부 당국자들의 협상에 기대감을 가져야 한다. 예상했던 일의 진척이 지지부진할지라도, 끝까지 인내로 더 이상의 인명이 살해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고 피해없이 모두가 안전하게 풀려나오기를 기도하며 기다려야 한다.


이번 사건으로 한 사람이 피살되었다. 우리는 그가 왜 피살되었는지 자세한 내막을 모른다. 그가 목사라는 사실과 한민족복지재단 아프칸봉사단의 단장으로 이번 한국인들의 인솔자라는 사실만 알고 있다. 따라서 그의 죽음에 대한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따라서 아직은 그의 죽음에 대한 평가는 성급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부 한국교회는 그를 순교자로 성급하게 추앙하고 있다. 어떤 이는 우리나라 선교초기에 대동강변에 피를 뿌렸던 토마스 선교사에 비견하여 그를 아프칸의 토마스 선교사라고 칭송하기도 한다.


선교(宣敎)와 봉사((奉仕)란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하여 연세 한국어 전자사전에서는 ‘선교’란 ‘종교를 전하여 널리 퍼뜨리는 것’이며, ‘봉사’란 ‘남을 위하여 자신의 이해를 돌보지 않고 애써 일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민족복지재단 아프칸봉사단이 아프카니스탄에서 활동한 성격은 무엇일까? 선교활동이었는가, 아니면 봉사활동이었는가? 그들의 활동성격이 선교가 목적이었다면 앞서 살해된 분의 죽음은 순교라함이 타당하다. 그는 분명히 선교를 위해 아프카니스탄을 방문하였으며, 그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던 중에 텔레반에 의해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민족복지재단 대표는 기자회견을 통하여 ‘그들이 아프카니스탄에서 활동한 목적은 기독교의 선교가 목적이 아니다. 순수한 봉사가 목적이었다’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한민족복지재단은 스스로 기독교 선교기관이 아니라 순수한 국제적인 봉사를 위한 국제 NGO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봉사단체라고 강변한 것이다. 그는 계속하여 ‘아프가니스탄에는 기독교 선교기관은 하나도 없다. 오직 NGO로서 국제봉사단체만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단다. 그렇다면 앞서 살해된 분의 죽음을 선교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자기가 해야 할 일에 충실하다가 변을 당하여 죽게 된 이들에게 ‘순직했다’는 말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국제봉사기관으로서 한민족복지재단 아프칸봉사단의 단장으로 아프칸 봉사할동 중에 변을 당하여 죽임을 당한 그는 순직자라고 함이 타당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그를 순교자 운운하면서, 그가 아프카니스탄에서 흘린 피는 그 땅에서 복음의 기초가 될 것이라고 성급하게 추앙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직은 이번 피납사태로 목숨을 잃어 버린 분에 대하여 순교자라거나 순직자라는 이름으로 추모하는 일은 시기상조이다. 한국교회가 그를 순교자로 추앙하게 된다면 아직 해결짓지 못한 사태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좀더 조용히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한다. 사태의 추이가 어떻게 해결될 것인지 해결의 실마리가 풀려지기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도리라고 여겨진다.


언제부터인지 자세하게 가름할 수는 없지만, 한국교회에는 해마다 휴가기간이면 단기선교라는 명분으로 짧게는 일 주일에서, 한 달 미만의 해외원정을 떠나는 일로 붐을 이루고 있다. 특히 선교학적으로 창의적 접근지역이라고 분류되는 위험한 지역에도 무분별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많은 해외원정대를 ‘단기선교’ ‘미션트립’ ‘비전트립’등을 명분으로 파송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들이 해외 현지에서 내세우는 명분의 대부분은 ‘봉사’임을 주장하고 있다.


앞에서 사전적인 설명을 했거니와 ‘선교’와 ‘봉사’는 동일한 의미가 아니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단기선교라는 명분으로 지원자를 모아 해외원정대로 ‘단기 선교사’로 파송하면서 해외의 현지에서는 ‘순수 국제봉사단’이라고 강변하는 이중적인 태도는 신실하지 못한 태도이다. 이것은 처해진 상황에 얼마든지 변신할 수 있는 카멜레온 전략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결과가 해외의 현지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되면 ‘기독교 선교단체’가 아니라 ‘순수한 봉사단체’라고 강변하기에 바쁘고, 아무 문제없이 무사히 귀국하면 ‘성공적인 단기선교를 하고 돌아 왔다’고 자화자찬을 아끼지 않는 모순된 일을 자행하게 되는 것이다.  


선교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해외원정은 무조건 복음을 전하는 선교라는 발상은 바르다고 할 수 없다. 해외봉사와 해외선교를 동일한 이해로 받아들이는 일은 위험한 일이다. 선교는 틀림없는 복음의 전도가 목적이어야 하며, 봉사라 할 경우에는 선교가 목적인 봉사인지, 단순한 봉사인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봉사를 선교와 결부시키는 일은 어떤 면에서 이율배반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될 수 있음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교회에 붐을 이루고 있는 일 주일이나 한 달 미만의 짧은 선교지 방문을 굳이 해외 단기선교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의 단기원정이 해외의 선교일선에서 일하는 사명자들의 사역을 증진시키는 기회가 된다고 여기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묵묵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일하는 이들에게 누를 끼치는 해악이 되고 있는 경우가 너무 많이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왜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며 단기선교라는 명분의 해외원정에 목숨을 걸고 있는 것처럼 비쳐지는 것일까?


마음이 몹시 착잡하고 괴롭다. 한국교회의 단기선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암담하게 여겨질 때가 너무 많다. 좀더 치밀한 선교전략 가운데 은밀한 중에 조용히 일하는 모습이 아쉽다. 세계교회에서 미국교회 다음으로 다른 나라에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선교대국이라고 자화자찬하기 이전에, 참된 선교정책과 선교전략이 세워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선교지에서의 위기관리 능력이 부끄럽게도 ‘0’에 가까운 수준인 한국교회의 실상을 보면 너무 속상하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이해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능력이 아직은 미숙하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다.


우리나라에도 불과 120여 년에는 조선민족의 마음 문은 꽁꽁 얼어 붙어 있는 상태였다. 이 때 우리민족을 섬기기 위해 청춘의 몸을 불태웠던 벽안의 선교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나라에서 배우자와 자식을 잃거나 부모를 잃어 우리나라 땅에 묻으면서 그저 말없이 수고하며 눈물 뿌려 일했던 사실을 우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들의 수고와 헌신은 요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말없이 조선민족들에게 빛이 되었고, 소금이 될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교회는 어떤가? 너무 요란하게 떠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의 비전과 욕망까지도 마치 주님의 것인양 간주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떼를 쓰고 있는 모습은 아닐까?


이제라도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자중하는 것이 아닐까? 조용히 주님 앞에 침묵하며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이번에 일어난 아프가니스탄의 피납사태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그들 모두가 안전하게 풀려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하고 있다. 정말 우리는 이번 사태가 어떤 결과로 끝나게 될지 모르고 있다. 우리는 피납된 두 명의 여인들이 들려준 목소리를 들었다. 언제 죽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 빨리 자기들을 구해달라고 호소하는 음성을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모두의 마음이 아프고 답답할지라도, 그들이 처한 환경을 생각하면 가슴이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지는 아픔을 느낄지라도, 그렇지만 어찌하랴. 그러므로 더 이상은 너무 시끄럽게 굴지 말아야 한다. 이번 사태에서 죽임을 당한 이가 순교자로 추앙되든, 순직자로 추앙되든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 일로 너무 시끄러우면 오히려 텔레반을 자극하는 일은 되지 않을까?


조금만 참자. 그대신 주님 앞에 조용히 엎드리자.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바르게 분별하기 위해 침묵하며 주님의 마음을 느끼기 위해 힘 쓰자. 주님께서 이번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이시는 것인지가 중요하지 않은가! 이제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주님의 뜻을 구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기도하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일일 뿐이다. 기다리자. 주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오, 주여! 텔레반에게 억류된 우리 지체들을 도우소서. 그들을 구원하옵소서. 그들의 생명을 보호해 주옵소서. 그들에게 주님께 더욱 충성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만 더 허락해 주옵소서.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주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역사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07. 6. 30 (월)


글/
불꽃 石一進

배우자를 위한 구체적 기도를 멈춰라?!

배우자를 위한 구체적인 기도에는 내 욕심이 들어가기 쉽다. 금주 로또복권의 번호를 구체적으로 알려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돈벌이의 수단으로 복권의 행운을 기대하는 자체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부동산 투기가 크리스천에게 합당하지 않은 일인데도 몇 평짜리 아파트를 달라고, 혹은 이번에 어느 신도시에 한 채 더 당첨되게 해 달라고 구체적으로 기도하곤 한다.


1.
우리는 가끔 어떤 말이나 교훈에 대해 성경보다도 더 권위있고 신빙성 있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마음에 담아두고 명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말들은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떠돌아다니는 것도 있고, 명저자의 글귀, 노래가사 등도 있다. 예컨대 ‘휴거’라는 단어가 성경에 있는 것으로 알고 그 단어 자체에 신비한 느낌을 가지거나, 마가나 누가가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인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말들 중 하나가 “배우자에 관한 기도는 구체적으로 하라”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나는 이 말에 반대한다. 여러 이유로 이렇게 가르치는 분들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말이 다소 인본주의적이고 성경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개인적 견해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주변에서 보면 배우자 기도가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간증을 듣게 되는 경우가 간혹 있다. 어떤 여자는 배우자의 키와 몸무게까지 기도를 했는데 그조차도 응답을 받았다고 놀라워했다. 그런 간증은 나름대로 귀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나… 미안하지만 이런 이들은 신앙이 아직 어린 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위의 응답 받았다는 여자도 준수한 키와 몸무게를 구해서 응답 받았다고 했는데, 이처럼 어떤 여자든지 아마 모르긴 해도 키 162에 95킬로의 남자를 놓고 기도하진 않을 것 같다. 알다시피 세상의 거의 모든 남자들은 오차범위 내에서 비슷비슷한 키와 몸무게의 여자를 원한다. 여자들도 남자의 경제력이나 키 등에 집착한다. 그러면 다들 비슷한 기도를 하게 될 것이고, 이거야말로 축구에서 상대팀에도 기도하는 선수와 어머니가 있는데 우리 팀이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애매한 일이다(이럴 때는 하나님도 “에이, 모르겠다. 니들 맘대로 차라”고 하셔서 실력 있는 팀이 이기는 거라던가?).
장애인과 결혼해서 헌신적으로 살아가는 귀한 사람들이 있다. 이 분들은 어떻게 기도했을까. 감히 추측해 보건대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구체적이든 막연하게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좋은 배우자’를 위해 기도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다. 하나님은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한 부족한 자녀를 위해 그들을 예비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결정은 어떠해야 할까.





2.
내 예전 직장 선배는 결혼과 동시에 해외에 나가는 것이 오랜 꿈이었는데, 마침 미국 어느 곳의 지사에서 근무하게 될 남자를 만나서 기도가 이루어졌다고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은 그런 조건을 바라며 찾은 신랑과 함께 유학을 갔는데 몇 년 후 이혼을 하게 됐다. 알고 보니 미국에 가는 조건 외에는 너무나 형편없는 남자였고, 비상식적인 시댁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녀는, 미국에 가려고만 했지 신중함이 없었던 결정에 대해 후회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신체적 금전적 조건이 아니고 성품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어떨까. 물론 가능하다. 하지만 기도로 그렇게 딱 맞는 사람을 데려다 주시거나 주변 후보들의 성격이 돌연 바뀔까? 그럼 맞는다는 의미는 또 무엇일까. 거의 모든 사람들은 신중하게 고르고 골라서 배우자를 선택한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문제를 만나고, 너무 안 맞아서 도저히 못살겠다고 한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잘 할 것처럼 생각하지만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누구나 단점이 있고 결혼으로 하나님이 맺어주신 이유는 서로 보완하며 잘 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배우자도 일종의 달성목표이거나 도달해야 할 타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일단 누군가를 찍으면 ‘저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며 그 주변을 일곱 바퀴 돌아 무너뜨리려 한다.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라는 말에 너무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삭도 야곱도 룻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예비된 배우자인 리브가와 라헬과 보아스를 만났다.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오랫동안 종살이를 하고 고난을 겪으며 ‘아내 쟁취’의 목표를 향해 달려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유별난 성품을 연단 받은 것이다. 배우자의 조건을 골라서 내 입맛에 맞추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으려니와 옳지 않은 생각이다. 내가 변화받고 연단받아 하나님과 사람 앞에 합당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이다. 결혼은 자기의 꿈을 이루는 도구가 아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하듯 결혼도 두 사람이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통로가 돼야 한다.

3.
유대인들은 기도와 눈물로 오랜 기간 메시아를 기다렸다. 지금도 그러고 있다. 그들은, 예언된 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고, 다윗의 혈통이어야 하고, 세상의 왕으로 정치적 능력을 지녀야 하고… 이런 구체적인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메시아를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모든 예언은 물론 수백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진정한 메시아였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영안이 없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진정한 신랑이었건만, 그들은 구체적인 조건들을 따지면서 예수님이 진정한 의미의 유대인의 왕임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저 선한 것이 나올 리 없다고 믿는 나사렛 땅의 목수로만 여겼으며,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그의 외모와 조건에 마음을 닫아 버렸다. 그 결과 그들은 폭도가 되어 하나님의 독생자인 메시아를 죽이고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른 민족이 되고 말았다. 그들의 영적으로 강퍅한 마음은 끝내 세상의 왕이며 정치적 해결사인 마지막 때의 적그리스도에게 환호를 보내는 최악의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배우자도 본인이 거부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 대가는 고스란히 자신의 몫이 된다. 구체적 조건 너머에 있는 가능성과 눈에 보이는 상황 너머에 있는 잠재성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4.
배우자를 위한 구체적인 기도에는 내 욕심이 들어가기 쉽다. 금주 로또복권의 번호를 구체적으로 알려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돈벌이의 수단으로 복권의 행운을 기대하는 자체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부동산 투기가 크리스천에게 합당하지 않은 일인데도 몇 평짜리 아파트를 달라고, 혹은 이번에 어느 신도시에 한 채 더 당첨되게 해 달라고 구체적으로 기도하곤 한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에도 응답하실 때가 있다. 그들의 수준에 맞는 은혜를 주신 것이다. 콜라가 해롭다는 걸 알면서도 가끔은 어쩔 수 없이 사주게 되는 것이 부모이다. 그럴 때면 아이들은 우리 엄마 최고하며 고마워 하겠지만, 부모는 아이가 맛 없어도 몸에 좋은 밥이나 야채도 잘 먹고 튼튼한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언젠가 깨달을 날을 기다리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응답을 해 주시지만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기도는 모든 것을 다 맡기며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기도이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믿는다면, 늘 가장 좋은 것으로 채우길 원하시는 내 아버지라는 것을 안다면, 적당한 때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주님 보시기에 좋은’ 배우자를 주실 것으로 믿고 다 맡기라.


예수님도 정말 피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당신이 원하시는 길이 있었지만,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길 원한다고’ 기도하셨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결혼은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성도들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신부로 인정하실 때 우리의 조건을 보고 택하지 않으셨다. 아마 조건을 따지기 시작했다면 누구도 쉽게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거나 구원을 받아 천국혼인잔치에 초대받지 못했을 것이다. 구원, 즉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은 어떤 조건이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고 값없이 받는 선물이다.

배우자 기도는 꼭 필요하지만, 그 내용은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멋지고 아름답고 성격도 좋은 킹카를 꼭!! 주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내게 꼭 필요한 귀한 사람을 예비하셨다가 보내시면 순종하겠나이다… 예수님처럼 이렇게 기도하라.
‘그런데 기왕이면…’ 하고 끝에 토 달지 말고~



http://story.godpia.com/contents/gisabon.asp?cID=H91&aID=4391&page=1

무엇을 신뢰해야될까..?

요 2: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신 첫번째 기적. 바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사건이다. 과연 하인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 묵상을 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없이는 내 이성과 생각을 초월한 신뢰와 순종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인들에겐 어떻게 보면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단순히 물을 떠 오는 것만으로도 예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헌신을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나는 단순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물을 떠오는 정도의 행위로서의 헌신이 아니라 내 남은 인생의 모든 것을 오직 예수님께만 전적으로 맡길 수 있는 정도의 신뢰를 갖고 살아가고 싶다. 이제 어느 정도 나이도 들어가고 평범하게 살아간다면 앞으로의 진로도 어느 정도 결정이 되어 버려서 더 이상 다른 직업을 갖거나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뭔가 큰 꿈을 가질 수도 없게 되어버린 상황이 아닌가 싶다.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할까? 단지 직업이나 결혼, 물질적인 문제들을 떠나서 내 인생이 어떻게 해야만 가치 있게 되고, 천국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이것이 내가 20대를 살면서 가장 많이 고민했던 문제이고 이 고민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2004년에 6개월간 호주를 여행하면서 하나님이 내게 주셨다고 확신하는 호주 원주민 선교의 길을 걷고 싶고 분명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강한 소망이다. 나 스스로도 그 길을 걷고 싶고 내 직업을 통해서도 조금씩 그 준비를 해 나가고 싶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내가 그 길을 걷도록 하실 계획이라면 분명 지금 이 순간도 그 목표를 향한 삶을 살고 있어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저는 작년부터 북사선을 통해 새터민 아이들을 섬기기 시작하고 있고 이것이 당분간은 변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든다. 솔직히 이것이 나에겐 앞으로의 내 인생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왜 한 방향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할 수는 없는지.. 하나님이 과연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모세에게 떨기나무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나서 “너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내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나에게도 그렇게 알아듣게 확실하게 말씀해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이 말씀이 그 하인들에겐 어떻게 들렸을까? 지금 당장 포도주가 떨어지는 사태가 일어났는데 왜 예수님은 나에게 난데없이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실까? 반문하지 않다. 그저 묵묵히 예수님을 신뢰하는 마음 하나로 힘들게 물을 채웠겠지. 그 예수님의 말씀이 지금 나에게 내 삶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과 만남들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 묵상을 통해 새로 깨닫게 된 사실이다. 얼마 전 my utmost for his highest 책에서 소명이란 제목의 QT를 묵상했었는데.. 그 책에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꼭 어느 누군가를 콕 집어놓고 그 사람에게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라디오 전파처럼 모든 이에게 그 부르심의 말씀을 하시지만 그 부르심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전적으로 신뢰하여 그 부르심에 순종하는 사람만이 쓰임받게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작년부터 내가 북사선을 통해 새터민 아이들을 섬기고, 여러 만남들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라디오 전파처럼 나에게 전달되고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하나님은 어느 순간엔가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가 전혀 생각도 못했던 인생을 하게 하실 수도 있지만 지금 현재 나에게 주어진 삶의 방식과 삶의 목표가 아귀까지 물을 채우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영접하고 지금의 삶에 전적으로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 같다.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은 현재 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는데.. 하인들이 그렇게 순종했을 때 결국 연회장도 알지 못했던 포도주의 근원을 알았던 기쁨을 알았듯이 하나님은 분명 나에게도 어느 순간 내 인생을 되돌아봤을 때 내 인생 한 순간, 한 순간에 간섭하셨던 그분의 계획을 깨닫고 기쁨이 충만하게 될 날을 주실 것이라 확신한다.

나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이 보배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7)





전북은행 본사 전주 출장….



전주에서 2박 3일동안 계속되었던 철야 작업 때문에 무지 피곤한 상태에서 기차를 타려고 전주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차역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데…



기차역 하면 가끔 나타나는 사람들… “저기 차비가 모잘라서 그러는데 돔좀 빌려주세요..”



그날 나에게… 정신지체가 있어 보이는 30대 중반 정도의 한 아저씨가 나에게 익산까지 가야되는데 차비가 없으니 돈을 달라고 대뜸 손을 내밀었다.



대합실에서 계속 그 분을 지켜봤는데 당연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무시했다. 그 분이 나에게 와서 돈을 달라고 했을 때 난 당연히 진짜로 익산까지 가려고 하는게 아니라 구걸의 수단인줄로 알았다.. 그래서..



그 분이 돈을 달라 했을 때 난 돈 대신 익산까지 가는 기차표를 직접 사주겠다고 했다. 그러면 난 당연히 그러지 말고 돈으로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정말로 그 아저씨는 익산까지 가는 기차표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내가 타고갈 기차랑 같은 기차인 새마을호를 끊어주려 했지만 새마을호 기본요금 때문에 코앞인 익산까지 요금이 8천원… 그래서.. 30분만 더 기다리시고 통근열차를 타라고 하고선 1200원짜리 익산행 통근열차 기차표를 사드렸다.



무지 좋아하는 그 아저씨.. 당연히 돈을 얻으려는 수작인줄로만 알았는데…



서울로 가는 길에 생각했다.


내가 무언가 큰 능력이 있어야만…


내 상태, 컨디션이 완벽하고 내 부족함이 없을 때에만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건 좋은 핑계거리게 지나지 않았다는걸 하나님이 그 30대 중반의 정신지체를 갖고 있는 아저씨를 통해 나에게 말씀하려고 하신듯….



익산까지 가는 1200원짜리 기차표가 절실했던 아저씨에게 내가 쓴 1200원은 기적이었을 것이다…



내가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고..


내 영적인 갈급함이 채워지지 않는다거나… 내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스스로 나는 훈련되지 않았고 아직은 하나님을 섬기기에 준비되지 않았다고 고백했던 것들…


내 안에 숨겨진 그 ‘기적’을 스스로 투명한 유리 상자 안에 가둬버렸던 것이라는걸 깨닫는다.


나도 믿지 않는 영혼들에게 기적이 될 수 있다…


아니 기적이 되고 있다….^^



“people want me to do everything for them.


but what they don’t realize is they have the power.


you wanna see a miricle, son?


be the miracle.”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 영화 대사 중에서 하나님이 브루스에게 말하는 대사… 영어듣기 연습하던때 수십번을 봤던 영화… 그 중 가장 꽃혔던 대사..)

중등부 단기선교 후기 (벧전 3:8-9)

중등부 단기선교 후기


8월 9일 출발 당일에도 저는 이번 선교를 통해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어떤 일을 이루실지 알지 못했습니다. 팀원 중 유일하게 칼출근을 해야 하는 직장인이었던 까닭에 준비 기간 중 새벽기도하고 아침만 먹고 출근을 해야 했고 마임, 찬양은커녕 간단한 일본어 회화 그리고 영적인 준비도 되지 않은 솔직히 스스로에 대한 적지 않은 실망감을 안고 출발을 했습니다. 출발 당일까지도 아이들 이름을 제대로 외우지 못하고 팀에서 아무런 할 일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제가 붙들었던 말씀은 잠19: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 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2001년 중국 연변 비전 트립을 떠나면서 비슷한 상황에서 의지했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기도 가운데서 분명 하나님은 이번 선교를 통해 내 안에 역사하시고 나를 통해 뜻을 이루시길 원하신다는 믿음과 확신을 갖고 출발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내 머리로는 알지 못하지만 차차 안개가 걷히듯 보여줄 것이라는 확신과 기쁨이 제 안에 있었습니다.


첫째 날 도착 직후 역시 신실하신 하나님은 내가 일본에 왜 왔는지 이유를 알게 하셨습니다. 이혜진 선교사님의 선교 특강을 통해 일본의 근대 기독교 핍박에 대해 알게 되었고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일본 사람의 폐쇄적인 성향, 일본인 친구들을 통해 보아왔던,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신뢰를 주지 않는 그들의 성향에는 극도로 잔인한 일본 근대 기독교 핍박에 그 백그라운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거리의 일본인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나로 하여금 그들의 상처를 깊이 체휼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최근 저는 우리반의 한 학생을 여름수련회에 초청하면서 그 학생에 대한 깊은 긍휼의 마음을 체험했습니다. 그 학생의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났습니다. 처음에는 알지 못했지만 그런 마음이 바로 그 학생이 앞으로 겪게 될 아픔과 상처가 이미 내가 사춘기 때 겪었던 큰 상처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수련회가 끝난 후 기도 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대해서도 본격적인 일정에 앞서 그들이 갖고 있는 아픔과 상처를 먼저 보여주시고 그 아픔을 마음으로 겪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너무 섬세하고 감사했습니다. 바로 ‘상처 입은 치유자 – Wounded Healer’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4박 5일의 일정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습하고 무더운 날씨에 몸이 지치고 길거리에 그냥 쓰러져 잠들고 싶을 정도로 육체적인 한계를 경험했습니다. 4일째 날 한 신사 앞에서 기도할 때에는 아찔한 현기증과 구역질에 귀신이 내 몸을 들락거리며 기도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느껴졌습니다. 10분도 안되는 짧은 기도 속에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승리를 선포하며 평안함을 찾을 수 있었지만 난생 처음 겪는 마귀의 직접적인 공격, 무더운 날씨로 인한 육체의 한계, 모두가 지쳐서 하나되지 못하고 영적 싸움에서 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등은 저에게 마귀의 큰 도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도전에서 결국은 승리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나중에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지만 비전교회 이혜진 선교사님은 저와 같은 캠퍼스 선교단체 출신입니다. 그런 공통점 때문인지 선교사님과의 대화가 즐거웠습니다. 선교사님께서는 그런 대화 중에 저에게 꼭 일본에 와서 사역하라는 말씀을 4-5번에 걸쳐서 하셨습니다. 그냥 지나가는 말이 아닌 진지한 콜링이었습니다. 이미 호주 원주민 자비량 선교에 비전을 갖고 인생의 방향을 그쪽으로 향해서 살고 있던 저에게 일본으로 오라는 진지한 말씀은 나의 남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라는 말이나 다름 없는 말입니다. 당연히 거부감이 들어야 하고, 평소의 저였더라면 두말할 것 없이 정중한 거절의 말이 나왔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저는 그때마다 선교사님 앞에서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일본에 대한 상한 마음을 내 안에 주셨는데 선교사님의 그 요청을 거절할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앞으로의 제 인생을 제가 모든 것을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케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해야 할 곳이 일본이든 호주든, 중국이든 북한이든 오직 하나님이 인도해주시는 대로만 따라가겠다는 다짐을 했을 때 역시 마음에 평안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일본 총리가 광복절에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한 뉴스를 보며 전 이전과는 다른 일본 민족과 그 지도자에 대한 불쌍한 마음으로 다가왔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단기 선교를 통해 내 안에 이루신 성령의 열매로 인한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제는 일본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중보자의 위치에 서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 알게 된 이상 과거 그들이 우리에게 했던 일들이나 현재 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는 시사 이슈들과는 100% 별개로 일본에 대한 상한 마음을 품고 기도하고자 합니다. 한국에 도착한 후 기도를 하며 이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단기 선교를 통해 내 안에 이루신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 받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3:8-9)

열매를 맺기 위한 기본…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7)


오랫동안 열매가 없는 내 삶은 무엇이 문제일까? 오랜 고민이다. 작년쯤부터 들기 시작한 이 생각은 최근에는 깊은 고민이 되었다. 대학교 2학년부터 전도와 제자 양육에 헌신을 했지만 단 한 명의 제자도 세우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분명히 준비되지 못한 점이 있을 것이라 생각을 해왔다.


우리 교회에서 매주 목요일에 열리는 부흥을 위한 연합 기도운동에 갔다. 그 모임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 경건에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벧후 1:5-7) 말씀을 통해 내 마음에 한가지 말씀하신 게 있다. 과연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덕이 되고 있는가? 타인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가… 지금까지 내가 고전 9:19 말씀을 내 인생의 모토로 삼고 사람을 위해 기꺼이 사람의 종이 되겠다고 다짐했었지만 실제 내 삶의 모습은 정말 그렇지가 못한 것 같다.


난 중등부에서 외적으로 볼 때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나 보다. 전도사님은 가끔 나를 공개적으로 칭찬도 하신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나를 책망하는 사람이 없는 환경에서 나는 자신에 대한 착각에 빠진 것 같다.


사도행전 2장에서 보여지는 초대교회 교인들의 모습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는 사랑이다. 지금의 내 모습과는 완전히 반대의 모습이다. 열매 맺기 위해 사람을 붙들고 안간힘쓰지 않아도, 당장 열매가 없다고 낙심하고 고민하지 않아도, 그저 다른 사람에게 나의 모든 것을 오픈하고 하나되어 하나님을 찬양할 때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던 것을 볼 수 있다. 부흥의 기본은 투명한 삶이라고 한다. 사도행전 말씀에서도 열매 맺는 삶의 모습은 투명한 삶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마치 예수님이 제자들과 항상 함께하시며 그 모든 삶을 제자들에게 오픈하셨던 것처럼… 내 삶이 은혜 가운데 투명해지고 사람들에게 숨기고자 하는게 없어질 때가 바로 나로 인해 열매가 풍성하게 열리게 되는 시작점이 되는 것 같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숨기지 않는 삶.. 하나님과 사람에게 동일하게 오픈되는 삶이 바로 내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삶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가을에 1:1 제자 양육을 하려고 마음 두었던 2명의 중등부 아이들과 그 외 모든 우리반 학생들에게 내 삶은 오픈되어 있는가… 내 삶이 그들에게 투명해지지 않고서는 그들이 나를 통해 예수님을 보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는다. 기도중에 성령께서 깨닫게 하신 것들을 위해 기도하고 조금씩 오픈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큰 방향을 잡아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