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언어

작년 가을 선물로 받았던 김우현 감독이 쓴 하늘의 언어라는 책을 그동안 GPTI 훈련 독서 과제로 미뤄오다가 오늘 1주일만에 다 읽었다. 나 치고는 꽤 빨리 읽었는데 그만큼 내용이 지금까지 내가 선입견이나 고정 관념으로 묶여있던 것들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어서 너무 재미있었다. 방언이라는 것에 대해 나 같은 백그라운드가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거부하거나 하찮게 여길 수 있을것 같은데 여러가지 경험들을 통해 풀어나가는 이 책은 너무 재미있어서 졸려서 눈이 감기기 전에는 손에서 놓기가 어려웠다.

하여튼 결론적으로 김우현 감독님에게 주셨던 방언에 대한 (성경적, 경험적) 통찰력을 이 책을 통해서 나에게도 주신 것이 감사하고 나도 초대 교회 성도처럼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에 대해 진지한 소원을 갖게 되었다. 책의 내용에서 분명히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열정과 지성으로 충만하다고 해도 이 마지막 때의 현실을 돌파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건 분명한것 같다. (책에서 표현한건 다른데… 어딘지 찾기는 힘들고.. 밑줄을 치면서 읽을껄..)

난 방언을 하지 못해서 잘은 모르지만 방언이라는 것이 일종의 현실적, 영적 현실로 부터의 도피처가 되는건 바람직하지 않는것 같다. 책에서 말하는 내용에는 분명 나의 세계관이나 신학에 부대끼는 부분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와는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마음을 열고 진지하게 읽을 수 있었던 것도 역시 GPTI 훈련으로 만들어진 체질 덕분인것 같다.

잘 읽긴 읽었는데 아직은 좀 두려운 구석도 있고.. 과연 내가 기도한다고 책에서 처럼 똑같이 될까 하는 생각도 있고 아직 그런 기도는 하지 않고 있는데 솔직히 책 속에서 김우현 감독님을 통해 방언을 받은 사람들이 부럽긴 하다. 아무튼 김우현 감독님을 통해 주신 방언에 대한 통찰력은 정말 대단하다.

새로운 통일관

(2006. 9. 21. YM목요모임 설교 요약)

우리가 가져야할 통일과 통일 한국에 대한 시각…

통일 후의 통일 한국은 남한의 연장도 아니고 북한의 연장도 아니다. 그렇다고 남한과 북한을 적절히 섞어 놓은 듯한 국가도 아니다.

통일 이후의 한국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이 되어야 한다.

brand new nation. whole new nation..

지금까지 나.. 그리고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통일에 대해서.. 우리가 북한을 거의 흡수하는 방식의 통일.. 그렇기 때문에 통일 한국은 남한의 연장선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박혀 있었던것 같다.

하지만…

19세기 말 일본 제국주의로 부터 시작해서..

미국, 러시아, 일본, 중국… 세계 열강들에 의해서 타의적으로 분단되어 버린 우리가 냉전의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남한’ 또는 ‘북한’… 이 둘 중 하나에 기반한 나라를 통일 한국의 모델로 삼는다면 그건 과거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완전히 새로운 통일 한국을 건설하는 일…

이런 전략으로 통일에 대해 접근한다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건 담대함이다.

우리 자신의 힘을 믿지 않고 갈렙과 여호수아처럼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승리하는…

인생의 열쇠

2010년 11월 6일 GPTI 경건회 인도

[1]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2]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3]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창 26:1-4)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인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과 우리의 인생 여정에 대해 묵상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젊은 제가 인생의 선배님들 앞에서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이 우스워 보일 수 있지만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우리 인생 각자에 두신 하나님의 의미와 목적을 함께 묵상해볼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이 말씀은 지난 주 QT를 통해서 묵상하게 된 말씀입니다. 말씀에서 하나님은 이삭에게 아버지에게 하셨던 축복을 동일하게 약속하십니다. 3절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그리고 4절에서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한가지 조건을 달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절에서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저는 이 말씀을 보며 마치 하나님께서 이삭의 아버지 아버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의 말씀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창12:1-2 말씀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거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는 대를 이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땅으로 계속하여 아브라함과 그 자손을 인도하고 계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어느 한 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걸쳐서, 아니 대를 이어서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하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이 있은 직후 26장 전체에 걸쳐 이삭은 방향을 잃은것 같습니다. 흉년 때문에 처음으로 가나안 땅을 떠나서 그랄에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삭은 그곳에서 한 때 풍년이 들어 그 해에 백배나 얻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거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요즘 투자를 해서 2배로 불리기도 거의 불가능한데 한 해에 백배나 불렸다니 정말 엄청난 축복인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축복의 핵심은 아니라는 것은 제 3자인 우리가 볼 때 너무나 자명합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순종의 땅 순종의 장소에 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삭은 그 이후에 아비멜렉의 시기를 받았습니다. 아비멜렉이 소중한 이삭의 우물을 막아버렸습니다. 우물이 막혀 버렸으니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삭은 우물을 파면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고, 막히고, 쫓겨자기를 여러번 반복해야만 했습니다. 사실 창세기에 이삭의 생애에 대해서는 26장에 나오는 것이 거의 대부분인데, 26장의 대부분이 이러한 방황처럼 보이는 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과정이었습니다. 23, 24절에서 이삭이 결국 브엘세바로 올라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이삭에게 축복을 약속하시고, 이삭을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끝내 인도함을 받고 나서는 그동안 갈등이 지속되던 아비멜렉과 화해 협정이 체결되었고, 그곳에서도 역시 우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의 말씀을 이삭과 그 자손들의 생애를 통해서 계속하여 성취해 가시는 한 단편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끝까지 요구하셨던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인생의 열쇠는 내가 하는 일이나, 나의 능력이 아니라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알고 끝까지 그 곳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 그것이 인생의 열쇠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의 일과 능력에 집중한 나머지 우물파는 일, 100배 불리는 일에 내 모든 것을 걸기도 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지만 그것에 매어 달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분명 있을 것입니다. 사소한 것이 될 수도 있고, 중요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에서 얼마나 빨리 벗어나고 자유케 되어 정확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느냐가 성공적인 인생의 포인트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겪었던 일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자전거를 즐겨 탑니다. 출퇴근도 주로 자전거를 이용합니다. 몇 주 전 팀에서 회식을 하게 되었는데 회식 장소는 회사에서 8km 정도 떨어진 어느 식당이었습니다. 그 식당에서 봉고차를 보내주었지만 저는 자전거를 타고 그곳까지 갔습니다. 처음 가는 길이라 지도 검색 프로그램에서 그곳까지 자전거로 가는 빠른 길을 찾아서 스마트폰에 저장시킨 후 그 길을 따라서 자전거를 타고 달렸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길이 좋았지만 점점 어두 컴컴한 골목길로 가더니 급기야 골프장 뒤쪽으로 있는 칠흑같이 어두운 산길로 가야 했습니다. 거의 등산을 하다시피 하는 산길이라 너무 힘이 들었고, 아무도 없는 산속을 자전거를 끌고 가느라 너무 무서웠습니다. 이 길이 과연 맞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순간 순간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목적지까지 가는 길을 직접 검색했고, GPS를 볼 때 내가 지금 그 경로 위에 있는 것과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분명히 맞다는 것은 확실했기 때문에 어찌 되었든 계속하여 GPS를 확인해가며 나아갔습니다. 결국 산길이 끝나고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진 신나는 내리막을 달릴 수 있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 식당에 도착해서 맛있는 저녁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일을 통해서도 깨달은 것은 내가 순간 순간 하나님의 인도하심 위에 서 있는가?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은 저의 내면에 항상 메아리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특히 이번 GPTI 훈련도 이제 중반기로 접어들었고, 많은 사람들과도 익숙해지고, 다양한 숙제와,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매너리즘에 빠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매주 숙제를 하고 보고서를 쓰는 것이 이제 조금씩 우물 파는 일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잇었습니다. 아무래도 제 마음 속에 이 훈련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은 있었던것 같습니다. 훈련 프로그램과 숙제가 저의 우물 파는 일이 되고 있었습니다. 사실 훈련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이 훈련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훈련이 끝난 뒤 어디가 되든지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우리가 있어야 할 우리의 가나안 땅으로 계속하여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해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는 저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물 파는 것에 목숨걸지 말게 하시고 어떤 포기와 내려놓음이 있다 하더라도 끝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갈망과 소원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선교와 문화 인류학 (폴 히버트)

1. 책 소개하기

이 책은 폴 히버트라는 인도 선교사 출신의 저자가 쓴 책이다. 저자는 문화 인류학이라는 학문을 선교에 접목시켜 선교를 함에 있어서 반드시 가져야 할 문화적 측면에서의 통찰력을 전달한다. 특히 저자는 인도에서 사역을 하며 겪어야 했던 실수와 시행 착오를 이 책의 다양한 예제 케이스로 활용하여 읽을 거리를 풍부하게 하였다.

Continue reading

결혼이 ‘일’인가…? 사람과의 관계도 ‘일’인가…?

결혼이 한달 앞으로 다가왔는데 아직도 실감이 안난다.. 30년 넘게 내가 살아오고 있는 이 삶의 패턴이나, 사는 방식, 가치관… 얼마전 4주 과정으로 교회에서 하는 결혼 준비 교실을 통해서 많이 준비가 되기는 했지만 아직은 겁도 나고, 조금 더 준비하면서 천천히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역시.. 결혼도 정말 큰 일이다.. 주말마다 해야 할 것들이 쌓여있고.. 주중에도 정신없이 바쁜데.. 회사에서는 Burning Month라는 이름의 40일 전투…(내가 지은 이름임…)를 하면서 의무적인 야근을 하고 있다. 결혼을 한달 정도를 앞두고 이런 일을 당하다 보니 회사 동료들은 날 볼 때마다 결혼 준비는 잘되어 가나요… 결혼이 코앞이라 할 일도 많을텐데 어떻해요… 등등의 말을 항상 건넨다. 관심 가져주고 먼저 물어봐주는게 너무 고맙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물어보는 “결혼 준비”라고 하면… 말 그대로 집 장만, 혼수 준비, 청첩장, 사진 촬영, 이사, 신혼여행 예약 등등… 아무튼 중요하긴 하지만 정말 “일”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이다.

솔직히 난 결혼을 앞두고 burning month의 매일 야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제일 걱정되었던 것은 결혼 ‘생활’에 대한 준비가 힘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렇게 우리 둘 사이에 관계가 민감해지는 시기에 회사일이 바빠져서 잘못하면 소중한 관계가 망쳐지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난 솔직히 회사 동료 분들이 그런 우리 관계를 걱정해주고 그런 부분에서 조언도 해주고 했더라면 더 고마웠을것 같다.

솔직히 결혼=생활… 이라면 결혼 준비는 일이 되어야 하는게 맞는것 같다. 하지만 난 결혼이란게 두사람이 만나서 같이 살면서 돈벌고 밥해먹고 빨래하고 아이 낳고 키우고… 하는게 절대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결혼 준비’는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내가 결혼 준비라는 말을 들으면 그런 실제적인 일 보다는 예비 부부로서 우리가 얼마나 영적, 육적으로 더 가까워 졌는지.. 서로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싸울것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지…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그리고 난 아직 그런 면에서 “결혼 준비”가 많이 되지 못한것 같아서 좀 두렵다. 생활?? 까짓거 준비가 많이 못되어도 살아가면서 필요한것 장만하고 돈도 열심히 벌고 하면 되는거겠지… (내가 세상을 너무 모르나…) 아무튼 그런건 별로 두렵지 않다.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굶겨 죽이시진 않겠지..ㅎㅎ)

“Burning Month”를 시작하며… 항상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 (살전5:16-18)

오늘 부터 회사에서는 Burning Month라는 이름으로 4월 말까지 밤 10시까지 강제적인 야근과 토요일 근무를 시작한다. 5월 초에 결혼식을 앞두고 이런 갑작스런 소식에 마음이 정말 좋지 않았는데 오늘 아침 출근길에 극동방송 God Family 연재 시간에 스트레스에 대한 말씀을 들었다. 어떻게 보면 결혼을 한달 앞두고 닥친 조금은 어이없는 일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내게 직접 말씀하고 계심을 느꼈다.

이 세상에 스트레스를 떠나 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느끼는 스트레스의 수준은 그가 당면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40인분의 요리를 준비하면서도 그 일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두세 명의 손님을 청해 놓고도 걱정 때문에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회사에서의 일 때문에 일주일 내내 스트레스를 받다가도 토요일만 되면 그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된다고 생각 합니다. 사실 토요일에는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그 동안 밀렸던 집안 청소도 하고 밖에 나가 친구들도 만나고 영화도 보게 되면서 평일보다 더 바쁘게 지냈는데도 말입니다. 그것은 토요일에는 이야 말로 출근하는 날에 느끼는 책임감과 부담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런가 하면 좋은 일 앞에 서도 스트레스를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 좋은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너무 긴장 한 채 손이 떨리고 손바닥엔 땀이 나고 입이 바싹 마르는 사람 말입니다. 이처럼 문제는 상황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과 삶 모두가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에 달려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모든 일이 주님을 위한 일이고 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는 확신 속에서 항상 기도에 힘쓰면서 그 일들을 기쁨으로 감당 할 수 있을 것입니다.

From GodFamily (http://bit.ly/aPIq5z)

어항 속 인생

사람의 인생은 어항 속 물고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어떤 허름한 식당에 갔는데 그곳에 정말 작고 귀여운 열대어들이 있는 어항이 있었다. 어항이 꽤 컸다. 정말.. 손가락 마디도 안되는 물고기 수십마리가 헤엄치고 있는데 신나서 왔다갔다 하는 애들도 있었고.. 조용히 숨은듯 가만히 있는 애들도..


그 어항을 보면서 어쩌면 사람 인생이 뭔가 대단해보이기도 하고 정말 절망적인것 같기도 하지만 결국 하나님이 보시기에 모두 똑같은 어항 속 물고기..

사람들을 보면 이미 성공해서 승승장구하는 인생도 있고.. 하나님 안에서 좋은 비전을 품고 그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있고, 절망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인생도 있는데.. 어항 밖의 내가 봤을 때 그 물고기들 각자가 얼마나 잘나고 얼마나 못났든 결국은 내가 밥을 주면 먹고 안주면 굶을 수밖에 없는 물고기다. 내가 방의 불을 끄면 물고기는 밤이 되는거고 불을 켜면 낮이 되는거다.. 큰맘 먹고 어항을 청소해주면 더 좋은 환경 더 깨끗한 환경에서 살 수 있는거고 내가 귀찮아서 그냥 가만히 있으면 더러운 물 속에서 힘겹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우리가 어리석어 보일까.. 뭔가 커다란 믿음의 체험을 하고 의기 양양하게 간증을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내가 그냥 손 하나 까딱 해서 굶고 있는 물고기에게 밥을 조금 준 것 뿐인데.. 어항이 너무 더러워서 청소해준 것 뿐인데.. 그러시는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나의 세상은.. 이 넓은 아름다운 지구.. 작년 유라시아대륙 육로여행을 하면서도 느낀거지만.. 그리고 광활한 우주 정말 끝이 없을것 같은 내 인생.. 물고기도 그렇게 느끼겠지..? 크고 넓은 어항, 그럴듯한 수초, 자갈, 때마다 공급되는 먹이, 밝은 조명, 산소를 공급해주는 공기방울까지.. 그것이 my world..이다


다윗이 시편에서 고백했던 수많은 시들.. 사람이 무엇이관대… 이런 마음으로 고백하지 않았을까.. 광야에서 하룻밤 묵기 위해 쳐놓은 천막에 누워서 두려운듯한 눈빛으로 하늘의 별을 쳐다보며 느꼈을 그 경외심 두려움 그리고 무한한 사랑.. 나도 항상 그렇게 살고 싶다. 그래.. 내가 지금 좋은 회사에 다니고.. 좋은 교회에 다니고 좋은 사람도 있다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라고.. 이런 마음이 겸손일까..?

聖化

聖化의 문제..
From My utmost for his highest

Sanctification is not a question of whether God is willing to sanctify me— is it my will?

Am I willing to let God do in me everything that has been made possible through the atonement of the Cross of Christ?

Beware of saying, “Oh, I am longing to be sanctified.” No, you are not. Recognize your need, but stop longing and make it a matter of action.

All that Jesus made possible becomes mine through………. what??

He completed everything for my salvation and sanctification so..

호주 원주민 선교의 당위성

이 글은 호주 정훈채 선교사님 홈페이지에 소개된 호주 원주민 선교의 당위성에 대한 글입니다. 저 역시 2004년 호주에 6개월간 머물면서 호주 교회나 유럽 같은 백인들이 호주 원주민 선교를 함에 있어서 분명 한계가 있겠다는 것은 절실히 느꼈고 한국이나 기타 아시아권에서 더 많은 관심을 갖고 더 많은 선교사가 나가야겠다는 것을 느꼈었습니다.

원주민 선교의 역사

원주민 선교를 처음 시작한 때는 1880년에 호주의 몇몇 단체들이 호주 원주민 선교회를 발족하면서부터 이다. 이렇게 복음을 받은 지 1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호주 어느 곳에도 원주민 목사에 의해 목양된 곳이 한 곳도 없을 정도로 자립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는 백인 선교사들의 선교정책이 정책적으로 원주민들 가운데 영적인 지도자를 세워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0년도에 이르러서 원주민 선교는 원주민들이 직접 참여해야 된다는 주장이 팽배해지자 그제서야 원주민 복음전도회(Aboriginal Evangelical Fellowship, AEF)가 발족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원주민 선교가 26년이 지난 1996년 서부 호주의 발가 지역에 처음으로 원주민 손에 위해 교회가 세워졌는데 이것은 복음을 받은지 120년이 지난 후에 되어진 일이며 이 교회가 원주민 교회 중 유일하게 자립이 되는 교회이다. 1997년 당시 호주에서 유학을 하던 정훈채 목사가 본격적으로 원주민 선교에 참여함으로서 서서히 원주민 교회들이 세워져 가고 있다.


원주민 선교의 당위성

호주 원주민 선교는 호주 정부와 선교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대부분의 원주민들이 마음의 문을 닫고 살고 있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울분을 참지 못하여 마약과 술로 그들의 한을 풀고 있으므로 현재 이것이 사회적인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원주민들은 신분상 공공 기관에 일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들의 풍토상 적응하지 못해서 대부분 실직수당으로 살고 있다. 더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많은 원주민들이 그들만의 고립된 생활을 하므로 풍습 전수식(Aborigines Initiation Ceremony)이라고 하는 토속종교, 무속신앙에 매여 있다.

마을에서 자란 원주민 지도자들은 부흥회나 집회를 통해 회심한 후 은혜를 받아 그들 나름 대로 전도하고 있을 정도며, 간혹 성경학교를 통해 1년간 수학하고 목사 안수 없이 목사(Pastor)라고 하는 호칭을 하고 교회를 이끌어가고 있을 정도이다.

서부 호주의 원주민

지금부터 약 230년 전에 호주는 주로 유럽인들의 집단 이주를 통해 이루어 졌으나 그 전에 이미 검은 색 피부(Black Fellow)를 가진 본래의 원주민(Aborigine)들이 이 광활한 땅에 살고 있었다. 이들의 모습은 검은 피부와 이마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움푹 들어가 있어서 마치 아직 덜 개화된 사람들로 보여지며 현재도 다소 도시화 된 곳을 제외하고는 족장 중심의 생활을 하고 있다.

서부 호주에는 공식적으로 119개의 공동마을이 있으며 이외에도 내륙지역에는 모든 문화를 거부한 채 옹기종기 모여서 살고 있는 원주민을 볼 수 있다. 비록 도시 주변에 사는 원주민들이라 할지라도 지금까지 백인들 틈에 적응하지 못하고 별도의 삶을 살고 있으며 여러 면에서 사실 소외된 삶을 살고 있다.

지금까지 호주 정부와 유럽계(European) 여러 선교단체들이 여러 방면에서 선교를 시도해 왔지만 번번이 실패해왔다. 그 이유는 유럽계 사람들이 호주 땅을 점령하면서 원주민들을 지구상에 멸종시키려 약 27만 명에 이르는 원주민들을 대량학살 한 일이 있으며(실제로 태즈매니아 섬에는 완전히 멸종시켰음), 한 동안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원주민 자녀들을 부모와 결별시켜서 집단 수용생할을 하게 하였으며 또한 정부가 선교단체를 통하여 정치적으로 통제하는 제국주의적인 선교를 해 왔으며 원주민들은 저주 받은 함(흑인)의 자손이므로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비성경적인 논리로 자기 동족을 위한 원주민 지도자를 양성하지 않은 일들로 인하여 백인들 및 그들의 선교단체를 불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원주민들은 약 30만 명 정도 추정하며 이들 중에 기독교인들은 약 2%에 불과하다. 이들이 쓰는 언어는 내륙을 중심으로 약 100여개의 방언을 가지고 있으나 대부분은 영어권 안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최덕신을 통한 한 없는 축복과 큰 도전

요즘 제 블로그의 referer 기록을 보니 검색 사이트에 “최덕신” 또는 그의 과거 허물과 관련된 원색적인 검색어를 입력해서 나온 결과에 노출된 제 블로그로 오시는 경우가 아직도 많다는걸 알았습니다.

2005년에 등록했던 블로그 글 주소
http://www.wayiam.com/blog/27 (새창)

방문하시는 분들의 검색 의도나 제 블로그에 달린 댓글을 보면 솔직히 안타깝습니다..
아직 우리 사회가 소위 ‘공인’이라는 부류의 사람들에게 너무 특별한 기대를 갖고 있는것 같습니다. 그들이 공인이기 이전에 예수님의 피를 나눈 한 형제라는 사실은 미처 떠올리지 못하는듯.. 그가 중세 수도사가 아닌 이상 우리를 대표해서 율법적으로 죄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만약 그가 정말 같은 가족이었더라면 어땠을지..? 그가 죄를 지었다는것 자체로 인해 그 사람 자체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의 판단은 일단 미뤄둔 채 안타깝게 생각하고 그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감싸주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판단과 정죄는 오직 예수님만이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 조차도 음행중에 잡힌 여인을 정죄하지 않고 죄 없다고 하셨다네요.. 이건 그에게나 저에게나 그리고 모든 분들에게 정말 기쁜 소식이 아닌가요.. (요 8장)

옛날 그에 대한 안좋은 소식이 퍼지기 시작한 것은 그와 관련된 한 분이 게시판에 올린 정말 감정적인 하소연하는 글을 올리고, 네티즌들에 의해서 퍼 날라지면서 부터 입니다. 요즘처럼 실명 인증을 거쳐서 글을 쓰는것도 아니었고 그 글을 쓴 사람이 직접적인 피해자인지 여부도, 그리고 감정섞였던 글이 얼마나 과장되었을지도 전혀 확인되지 않았는데도 일단 그를 매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통제 불가능한 인터넷을 너무 과신하는 것도 좋지 않지만 자기 혼자 읽는것에 그치지 않고 너도 나도 여기 저기 게시물을 퍼 나르면서 오해에 오해가 쌓이게 하는 것도 자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퍼나르기가 계속되어 그 소문은 6-7년이 지난 지금도 인터넷 어딘가에서 떠돌아다니고 새로운 정죄자들을 만들어내고 있는것 같습니다.

전 그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그리고 뮤지션으로서의 활동을 새로 하려고 하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 사회가 복음적으로 순수하게 살아있다면 그가 다시 음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할 때 아무런 판단 없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은 그가 90년대 만들었던 앨범들이나 주찬양 사역들에 한창 바쁠 때 그런 심각한 죄를 범했다는 것에 대해 용납하지 못하는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그럴듯한 곡을 쓰면서 사람들을 속일 수가 있는가..? 하지만 저는 그가 그렇게 아름다운 곡들을 쓸 때에도 마음에 죄악된 본성으로 지배받고 심각한 죄 가운데서 그 곡들을 썼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여전히 죄인이고 하나님을 뜨겁게 예배하고 1시간도 되지 않아 어느새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는 걸 종종 경험합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 죄를 끊임 없이 씻어주고 계시다는 것. 이미 예수님이 그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이제 우리가 비난하는 그의 죄는 존재하지도 않는데 우리만 과거에 얽매여서 용납 못하고 있는건 아닌지… 유교적 백그라운드에서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민족의 성향 같습니다. 정말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90년대 말 대학생이었을 때 주찬양과 최덕신 앨범들을 너무 좋아했던 저로서도 정말 가슴아픈 소식이었지만 사람에 대한 판단은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때와 마찬가지로 제일 좋아하는 주찬양 11집, 갈망, 긍휼 같은 최덕신 개인 앨범도 자주 듣습니다. 우리나라 크리스천 사회에 최덕신이라는 분은 너무나 큰 축복인 동시에 우리가 받아들인 복음에 대한 하나님의 강한 도전이라고 생각되네요. 저는 그를 축복하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