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까지 감동시키는 삶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삼상 24:6~7a)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



그에게 찾아온..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위기의 순간 또는.. 결정의 순간에 항상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하였을 때 결과적으로는 승리하는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처럼 내 인생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원리는 의외로 간단한 것같다.






삶에서 부딪치는 수많은 문제들. 그 문제들을 놓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순간 순간 하나님이 주시는 한마디 한마디의 작은 말씀들이 결국 나로 하여금 절대로 삶의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는 가장 지혜로운 전략적인 삶.. 멋진 인생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 확신한다.






결국 원수인 사울의 입에서 조차 다윗을 향한 찬사가 흘러나오게 되었다.



다윗의 삶이 결국 승리로 끝나게된 원동력이 이것이 아닐까..?



난… 원수까지도 감동시키는 삶을 살고 싶다.

양심에 대한 재발견(?)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요일 3:21)


사람의 마음에는 누구에게나 양심이 있다.
양심은 내 마음 속의 작은 하나님이라고도 한다.
어떤 일에 대한 판단이 자신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갖게될 수 있는 이유인 것 같다. 물론 자신의 양심이 성경의 가치관대로 올바르게 자리잡아야겠지만…
이 말씀으로 생각할 때 어떤 일이 나의 양심에조차 반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용서와 용납의 하나님을 억지로 끌어들여 자신을 합리화하려고 했던 많은 기억들이 떠오른다.
십자가 복음을 너무 값싼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 예수님은 나의 사소한 죄문제 하나 하나를 위해 그토록 고통당하셨건만…

나를 발견하고 기대하는 2006년

이 글은 여호와앞에 요셉같이 (사랑의교회 중등부 QT책) 2006년 1월호에 실린 원고입니다. 책에 실린 원고는 약간 편집을 거쳤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발견하고 기대하는 2006년




2005년 1 1 0. 저는 송구영신 예배에 혼자 와서 이유 없이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앉아 있었습니다. 몇 가지 계획했던 일들의 실패와 사람과의 관계로부터 받은 실망감, 사회 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부담감 등
어쩌면 그 눈물은 감사와 찬송의 눈물이라기 보다는 그 동안 받았던 상처와 배신감, 부담감으로 고통 받다가 한 순간 아버지 품에 안겨 서럽게 우는 어린아이의 눈물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라는 찬송가 가사가 어찌나 내 마음을 때리던지



 



한 해를 이렇게 우울하게(?) 시작했지만 지난 2005년의 수개월간 양육과 묵상 속에서 조금씩 나의 가치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저에겐 많은 포지션이 있습니다. 사랑의교회 주일학교 교사로서의 나, 대학시절 함께했던 믿음의 친구들 가운데의 나, 9다락방 총무로서의 나, 우리 집 장남으로서의 나, 회사 직원으로서의 나, 어떤 사람을 많이 사랑했던 남자로서의 나, 심지어는 자아도 없이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자처했던 사람으로서의 나 2005년과 그 전에는 라는 존재감을 갖게 할만한 여러 가지 이유와 포지션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저는 이러한 이유들에서 자유하게 되어 어느 누구도, 어떤 과거도 개입하지 않은, 예수님 앞에 발가벗고 서있는 죄인으로서의 나를 다시 한번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와 사회의 여러 가지 타이틀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견되는 모습이 아닌 보이지 않는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찾아가는 나의 모습. 솔직히 말해서 이건 참 어렵습니다. 니모를 찾아서를 보셨다면 이해하실 수 있겠죠. 마지막 장면에 어항 속에 있던 니모의 친구 물고기들이 극적으로 바닷물로 탈출하고 환호하지만 묶여진 비닐봉지 속에 들어있는 자신들의 모습들을 보고선 Now what?! 이라는 마지막 대사를 남기고 영화가 끝나버립니다. 극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구원받아 일단 새로운 영적 세계에 풍덩~ 빠져들었지만 자신의 모습을 확실하게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의 고민 Now what?! 어찌 보면 27살의 어른이 하기엔 많이 늦은 고민이 아닌가 싶고, 주일학교 교사가 어찌하여 이런 고민을 하고 있냐고 손가락질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께 가장 영광이 되는 것인지, 내가 정말 사랑하는 일이 무엇인지, 당장 2, 3년 후에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조차 잘 알지 못하는 27살의 어른은 28살이 되는 2006년에도 예수님과 함께하는 자아 찾기를 계속해야 할 것 같습니다.



 



2006년을 바라보는 이 시점에서 저는 기대에 부풀어 있습니다. 그 동안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나의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고 기쁨 충만할 일, 새롭게 보이실 주님의 계획들을 알게 되어 소망이 가득할 일,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과 학생들, 새로 맺게 될 관계들을 생각할 때 2005년의 시작에 비교하면 극적 반전이라고 표현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렇듯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승리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저는 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소그룹 (공동체) 생활과 우울증

이 글은 헨리 나우웬의 책 친밀함 (Intimacy Henri Nouwen) 103~108페이지에 걸쳐서 언급되는 소그룹 생활과 우울증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원래 책에서는 이 부분이 신학교 안에서의 우울증과 딜레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이라 내용이 전체적으로 신학교 안에서의 소그룹에 대한 문제를 진단하고 있는데 요즘 대부분의 교회들과 일부 대형 교회들의 목적성 있는 소그룹 (또는 특별한 사역을 위한 소모임 등)에도 충분히 적용되는 내용이라 생각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소그룹에 대한 고정 관념을 인간이라는 독립되고 가치 있는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함으로써 재발견하고, 쉽게 빠질 수 있는 몇 가지 문제들을 진단해내고 있습니다. 일단 이 부분에서 문제점들을 찾아내긴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책의 다음 장(이 요약 본에 없음)에서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아래 글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소그룹의 어찌 보면 당연한 모습을 저자는 잘못된 모습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같은 저자가 자신의 책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에서 이야기하는 교회의 모습과는 또 모순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저자가 원래 언급했던 내용이 신학교라는 집단 내에서의 소그룹을 이야기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성숙한 사람들의 모임, 특별한 목적이나 훈련을 위해 모이는 소그룹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 보시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2005. 12. 6. 송형기


 



 









 



소그룹 생활과 우울증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소그룹 또는 팀은 수직적인 관계로 인한 비인격적 생활에 대한 반작용으로 볼 수 있다. 큰 집단을 작은 팀으로 나눔으로써 진정한 형제애의 가능성을 창출하며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생활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대화와 토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부분에서도 언제나 상황은 뜻한 방향대로 움직이지 않는 법이다. 팀 방식이 안고 있는 문제를 크게 세 가지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문제는 구성원들이 더 이상 서로 피할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소그룹들의 자생 터전이 되는 큰 집단에서는 못마땅한 사람들을 피하고 생각이 다른 이들과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모임에도 비교적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다. 반면 팀에서는 소수의 동료들과 아주 가까울 수밖에 없다. 내가 하는 많은 행동은 팀원들의 비판의 눈을 벗어날 수 없으며 거꾸로 팀원들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팀 모임에 가지 않으면 금방 눈에 띌 뿐 아니라 그룹에 대한 흥미나 헌신 부족이라는 질책을 받게 된다. 모임 중에 말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내가 침묵하는 이유를 알려고 한다. 내가 행하거나 행하지 않는 모든 일들에 개인적으로 깊은 의미가 부여될 수 있다. 그러므로 팀 생활은 분명 대단위 집단 생활보다 요구하는 것이 훨씬 많다. 훨씬 높은 성숙이 필요한 것이다.



 



둘째 문제는 팀의 의미에 대한 혼란과 관련이 있다. 일반적으로 팀이라는 말은 다양한 장정의 융합을 통해 특정한 과제를 더 훌륭히 수행할 수 있는 소수 사람들의 협력을 일컫는 말이다. 팀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은 팀원들의 공통 과제다. 팀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면 그것이 업무의 질에 그대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람을 양성하는 상황에서는 팀이 과제 지향적이 되지 못할 때가 많다. 이 경우 흔히 구성원들이 기대하는 팀은 팀원들에게 최선의 생활 조건을 제공하는 곳이다. 마치 바쁜 하루를 보내고 난 뒤 돌아가는 가정과 비슷하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시작된다. 팀이 과제 지향적이 아니라 자아 지향적이 되기 십상이므로 이제 팀의 문제는 수행해야 할 일의 본질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대인 관계의 본질 때문에 생겨난다. 이 경우 팀 모임은 다분히 아마추어 그룹 치료로 전락하기 쉽다. 팀원들은 서로를 향한 감정을 탐색하려 하며, 혼자 간직하는 것이 훨씬 좋을 많은 문제들까지도 털어놓으라고 부추긴다. 그렇게 되면 팀 모임에는 긴장이 팽배할 수 있다. 개인 문제를 벗어나 공통 관심사로 나아가지 못한 채 자아 중심으로 치닫다가 자아 도취의 경지까지 이를 수 있는 것이다.



 



퇴행이 전혀 허용되지 않는 문화는 사람들을 파멸에 몰아넣을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인간은 잠자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일은 잠든 동안에 일어나지 않는다. 우는 것,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 사랑과 미움의 감정을 숨김없이 표현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 건강에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것은 다 진보가 뒤따를 때에만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일시적 퇴행인 것이다. 형성기에는 퇴행을 허용해야 하며 때에 따라서는 권유할 필요도 있지만, 퇴행이 추구의 이상으로 간주되어서는 절대로 안된다. 어디까지나 이상은 자아에 집착하고, 울고, 내 감정을 다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내 문제를 잊고 내 관심과 주의를 요구하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퇴행적 행동 양식을 장려하는 팀은 본연의 목적을 거스르는 셈이다.



 



여기서 팀의 마지막 문제가 발견된다. 친밀함과 관련된 것이다. 사춘기 아이들과 청년들은 아주 괴로울 정도로 깊은 외로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는 진이 빠질 정도로 상대에게 매달리는 우정을 통해 이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는 성향이 있다. 이것은 원초적 필요에 바탕을 둔 미숙하고 집착적인 우정이다. 소그룹의 과제는 이들을 깨우쳐 이런 충동적 필요에 더 이상 끌려 다니지 않고 성숙한 자기 인식과 자기 확신에 이르게 해주는 것이다. 그럴 때 우정은 나누고 용서하는 관계로 자라날 수 있으며, 외로운 감정도 성숙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팀을 원초적 필요와 욕심에 따라 움직이는 일개 파벌로 전락시키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많은 구성원들이 스트레스가 무척 심해 친밀함의 집요한 욕구에 이끌려 친구들에게 매달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개 비현실적인 환상만 자극할 뿐이다.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친구가 어디선가 날 기다리고 있다가 내 모든 좌절감을 해소해 줄 것이라는 환상 말이다. 팀이 이런 비현실적인 친밀함의 욕구를 채워 주는 방편이 된다면 오히려 큰 해가 될 수 있다.



 



이렇듯 팀이란 그 책임자들의 특별한 주의가 필요한 아주 특수하고도 정교한 사역이다. 최대의 위험은 과제 지향적인 팀이 자아 지향적인 오합지졸로 전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집착적 관계는 구성원들의 정신력을 고갈시키며 퇴행 행동까지 부른다. 이런 상황에서 구성원들은 성격이 까다로워져 곧잘 따지고 쉽게 짜증낸다. 인간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관심을 요구하고 인간이 보일 수 잇는 것보다 더 깊은 동정을 바라는 성향이 나타난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건강의 정도를 넘어선다. 구성원은 자신의 고독을 아주 미묘하게 즐기며 그야말로 버릇없는 아이의 전형적 증상을 보이게 된다.



이런 퇴행 행동에 뒤따르는 가장 보편적이고 전염성 높은 증상이 바로 우울증이다. 그것은 아무도 날 이해하지도 사랑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느낌이요, 묘하게 뒤범벅이 된 애증의 대상들에게 동정을 얻고 싶어하는 욕망이다.



 



이렇듯 소그룹 생활은 의도와는 정반대로 아주 우울한 생활 방식으로 쉽게 변질될 수 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런 감정들이 대게 너무 모호하고 삶 전반에 확산되어 구성원들 자신은 물론 책임자도 문제의 근원을 여간해서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부시 대통령의 멋진 발언



“My hope is that the government of China will not fear Christians
who gather to worship openly” – 2005, George W Bush


APEC 정상회담이 끝난 후 중국, 몽골 방문길에 오른 부시 대통령이 지난 주일 북경의 한 개신교 교회에서 예배를 마친 후 한 발언이다. ‘난 중국 정부가 공개적으로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는 기독교인들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란다.”
중국 정부의 종교 압박 정책을 그들이 크리스천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상황을 180도 반전시켜 버린 멋진 발언에 이어 후 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을 만난 자리에서는 이런 발언을 했다.







“It’s important that social, political and religious freedoms
grow in China and we encourage China to continue
making their historic transition to greater freedom” – 2005, George W Bush




부시는 이 말에서 사회, 정치의 자유 뿐 아니라 기독교의 자유를 ‘더 큰(위대한) 자유’라고 정의했다. 번역하자면  “사회, 정치 그리고 종교의 자유가 중국에서 더욱 자라나야 하는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우리(미국)는 중국이 더 큰 (위대한) 자유로의 역사적인 변화를 계속 만들어 나가길 바란다.” 기독교적인 가치관으로 정치를 하는 그가 몇가지 깊은 오점을 남기긴 했지만 그래도 말 하나 하나가 여전히 힘이 있고 흔들리지 않는 기준이 있는 것 같다. He’s cool..!


2005. 11. 21. 송형기
발언 내용은 아래에서 참조함.
http://www.washingtonpost.com/wp-dyn/content/article/2005/11/19/AR2005111901286.html

이기준 교육부총리 사건을 보며

이기준 교육부총리 사건을 보며


57시간이란 최단수명 기록을 남기고 사퇴한 이기준씨 교육부 총리 사건을 보며 우리 사회의 가치관의 대립이 이렇게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런 차이가 결국은 나라를 하나되지 못하게 하여 결과적으로는 삼류 국가로 전락하게 만드는 원인이 될 수 있다. 한국전쟁 이후 민주화 운동과 경제 성장 운동을 통해서 하나의 비전과 목표를 갖고 한마음이 되었던 국민들이 이제는 진보와 보수 내지는 전통적인 가치관과 서구적인 가치관 속에서 나아갈 방향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과 정부는 교육 개혁을 단행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을 찾는 과정에서 이기준이라는 사람을 찾았지만 역시 적지 않은 도덕적인 결함과 문제 발생의 요지를 발견하고는 고심했던 것 같다. 그러나 정부의 이번 인사에서의 기준은 전통적인 기준 보다는 한 사람의 능력을 우선시 하는 서구적인 기준이었기 때문에 이기준씨의 도덕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인사를 단행했지만 결국은 전통적인 기준을 내세우는 시민단체들과 일반 국민들의 반발에 부딧쳐 결국은 57시간만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는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큰 낭비가 아닐 수 없다. 다시는 발생하지 말아야 할 일이지만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가치관의 혼돈을 극복하지 않는 이상 이런 문제는 사회의 어느 곳에서든 계속하여 일어날 것이다.

여러 가치관 중에서 특히 최근 들어서 국민들이 원하는 지도자상은 이런 것 같다. 능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아도, 확고한 목적의식과 비전이 없어도 일단 도덕성에 문제가 없고 청렴한 사람이라면 일단은 지도자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한마디로 말해 목민심서적인 지도자를 원하는 것 같다. 지난 대선때 이회창 후보가 탈락했던 가장 큰 이유중 하나도 그의 도덕적인 문제였고 역시 같은 교육부총리직에서 24일만에 사퇴했던 송자씨의 경우도 그러하다. 이런 의식은 지도자뿐만이 아니라 연예인과 같은 공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 군 면제 비리 사건이 터질 때마다 당사자들은 정당하게 죄값을 치름에도 불구하고 온갖 비인격적인 모독을 감당해야만 했고 어떤 가수의 경우에는 영원히 입국이 거부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솔직히 나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가치관이 국가의 선진화에 큰 방해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의 정부는 이러한 전통적인 가치관 보다는 좀더 서구적이고 개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 같다. 대통령 선거때의 여러가지 공약을 보거나 정부의 인사 기준을 보더라고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인사에 관련해서는 이번 이기준 교육부총리 사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단점없는 사람’보다는 ‘강점있는 사람’ 중심의 인사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 같다. 특정 분야에 강한 사람을 쓴다는 것은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 목표 달성에 적합한 인물을 쓰면서 그만큼 다른 분야, 예를 들면 도덕성과 같은 부분에서 드러나는 단점이 있다면 그것을 묵인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한 설교에서 들은 비슷한 경우를 들자면 남북전쟁 당시 북쪽의 링컨 대통령이 단행한 군 인사를 들 수 있다.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예비역에서 소집된 그랜트 대령을 장군으로 발탁하여 중용하였다. 여러 사람들은 당시 그랜트가 갖고 있던 나쁜 버릇인 술주정을 트집삼아 적절치 못한 인사였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링컨 대통령은 오히려 그랜트가 좋아하는 술을 다른 장군들에게 한상자씩 보냈다고 한다. 그들도 같은 술을 마시고 그랜트 처럼 훌륭하게 되라는 의미에서였다. 또한 1759년 캐나다 퀘벡을 점령한 영국의 울프 장군을 누군가가 국왕 조지 2세 앞에서 울프 장군을 미친 개라고 비난했다. 그의 성격의 단점을 비난했던것 같다. 그러자 국왕은 “제발, 그 울프 장군에게 다른 장군들도 한 번씩 물려서 모두 그 같은 미친 개가 되었으면 좋겠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손자병법에는 “장수가 능력이 있고 군왕이 그 장수의 指揮(지휘)를 제어하지 않으면 승리한다(將能而君不御者勝)”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러한 ‘강점주의 인사’는 결국 전쟁에서의 승리라는 좋은 결과로 이끌어 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어떤 가치관이 더 옳다는 결정을 내리는 것을 불가능해 보인다. 항상 시대에 따라, 문화에 따라 가치 판단의 기준은 항상 달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유교 사상이 팽배해있던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쇄국 정책이라는 어이없는 결정이 통일된 국가 정책으로 유지되었던 시절이 불과 200년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그런 변화의 속도는 상당히 빠르다는 것이고 우리 국민 대다수고 옳다고 여기고 있는 이 전통적인 가치관은 하루 빨리 변화되어 정부가 갖기 시작한 발전적인 가치관과 부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와 그 구성원의 가치관의 흐름이 같은 방향을 가질 때에만 우리가 갈급하는 선진국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다.

디지털은 아날로그를 담는 그릇

유비쿼터스라는 말이 요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3-4년 전에 학교에서 이런 용어를 들었을 때만 해도 이런 일이 정말 이루어질까 의심했지만 홈네트워크와 물류 산업을 중심으로 이미 유비쿼터스라는 말은 이미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유비쿼터스라는 새로운 화두의 이면에는 RFID라는 핵심 기술이 자리잡고 있다. 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을 의미하는 RFID는 전파를 사용해서 사람, 물건 등의 사물을 식별할 수 있는 기술이다. 요즘 흔히 보는 교통 카드 보다 조금 더 먼 거리에서 식별이 가능하다고 보면 될 것 같다. 특히 우리나라 기업들이 유비쿼터스 컴퓨팅에 대해 일찍 눈을 뜨고 이미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하고 상용화에 앞장서고 있는 것을 보면 역시 우리나라는 IT강국인 것을 느꼈다. 적어도 몇주 전, 미국에서 RFID의 사용을 금지시키는 법안 통과에 대한 신문 기사를 읽기 전에는…
미국에서의 스토리는 이렇다. RFID를 사용한 개인 사생활 침해를 우려한 나머지 캘리포니아 주 정부가 RFID의 사용을 엄격히 제한하는 법안을 6:1로 통과시킨 것이다. 엄격한 제한이라 함은 교도소에서의 죄수 관리와 병원에서 신생아를 관리하는 것 등을 제외하고는 모든 RFID 사용을 제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찌 보면 이는 시대에 역행하는 어이없는 결정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결정은 IT 산업이 현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현실이 IT 산업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중요한 원리에 부합하는 결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가 IT 산업 육성에 전력을 다해왔고 한국이 현재 IT 강국중의 강국이라는 사실을 국민 누구나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국민에게 왜 우리나라가 IT 강국인지 물어본다면 아마도 대부분은 ‘초고속 인터넷의 대중화’를 꼽을 것이다. 초고속 인터넷은 두말할 것도 없이 정보 고속도로의 역할을 수행하는 중요한 정보 인프라 시스템이다. 70-80년대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전 국토를 고속도로로 연결하여 1일 생활권을 현실화한 것이다. 하지만 이 정보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내용 (컨텐츠)은 정보 선진국의 그것과 비교할 때 부가가치를 생산하기 보다는 지나치게 소비적인 것이 사실이다. 무조건 기술을 발전시키고 무엇에든 응용하려고 한 우리 정부의 잘못된 철학의 결과이다.
세계 1위의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과 유비쿼터스 기술의 보급에 대한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가질만 하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의 주인공이자 IT 기술의 장점을 충분히 누려야 할 사람에 대한 고려는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RFID의 다양한 도입으로 개인 정보 유출에 대한 걱정은 없는지, 홈네트워크의 보안에 대한 고려는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는지 모든 각도에서의 공격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판단될 때 IT 기술이 현실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기술 경쟁력에 사람 중심의 사고 방식이 곁들여 진다면 IT 강국을 넘어 진정한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할 날이 금방 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2005년 5월 15일

A Love-Giving Life

2005년은 나에게 있어서 여러가지 변화를 맞게되는 한해이다. 길고 길었던 학생이라는 타이틀을 떼고 경제활동을 하는 사회인으로 첫 발걸음을 내딛은 한해가 되고, 개인적으로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정리가 필요하기도 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2005년 2월 마지막주 부터 교회에서 중등부 교사로 봉사하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한 영혼에 대한 소중함과 그로 인한 부담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다시금 영혼을 살리는 일에 동참하게 되었다.
내가 주일학교 교사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된 이야기다. 대학교 학부 시절 열악한 환경 속에서 캠퍼스 복음 사역에 동참하고 찬양팀을 인도하며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신앙 안에서 많이 강한 사람으로 변화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모든것이 풍족한 사랑의교회로 옮기고 대학부라는 공동체에서 섬김만 받으며 있다 보니 어느새 영적인 긴장감은 풀어지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선명한 이미지는 점점 흐려지는 것 같았다. 그때 부터 기도를 했던 것이 주일학교 교사였지만 역시 무언가를 결단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2003년부터 교사에 대해 생각이 있었다. 2003년 가을에는 교회에서 하는 교사 훈련원에 등록해서 훈련도 받기도 했지만 2004년 초 호주 연수를 핑계로, 그리고 그해 말에는 대학원 논문을 핑계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피하기만 했다. 언제나 그렇듯 마음은 편하지가 않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 어느때보다 확실했다. 마음으로 밀려오는 부담감을 더이상 피할 자신이 없어 아직 적응조차 하지 못한 직장 생활에 대한 부담감을 떠안은 채 중등부 교사에 자원을 했다.
처음 교사를 시작하면서 맡은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는 한마디로 한창 까부는 아이들이다. 특히 우리반 아이들 중에는 다른 선생님들도 인정하는 ‘이상한’ 아이들이 둘씩이나 있다. 말과 행동을 보면 기본적으로 반항 기질이 있는 것 같다. 이런 아이들을 앉혀놓고 말씀을 가르치고 말을 시키고 올바른 대답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어 보였다. 이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쉽사리 생기지 않았다. 기도를 하고자 해도 기도 역시 되지 않고 교회에서 만날때는 일단 한숨부터 나오는 상황이었다.
4월 5일은 중등부 전체가 옛날식으로 가족 운동회를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우리반 학생들은 전원 나오지 않았다. 회사가 갑작스럽게 바쁜 상황에 내가 응원 단장 역할까지 하게 되어 아이들을 챙기는게 쉽지가 않았는데 막상 운동회에 아이들이 나오지 않으니 처음으로 아이들에 대한 섭섭한 마음과 미안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날 운동회가 끝나고 교회 기도실에서 기도를 하며 아이들이 단 한명도 나오지 않기까지 아이들에게 관심가져 주지 못한 것에 대해 회개 기도를 하면서 답답한 마음을 쏟아놓았다. 다른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고 품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두번씩이나 사랑하는 사람으로 부터 거절당한 후, 다른 사람을 절대로 먼저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까지 했던 상황에서 역시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다. 이 글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마음속의 상처는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데 많은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기도실에서 기도를 하며 얻게된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사랑을 주는 것은 너의 은사다. 내가 너를 사랑 주는 인생으로 빚겠다.’ 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너무 분명히 말씀하시는 이 하나님의 약속의 음성에 확신을 갖게 되면서 그때 부터는 마음 속의 상처를 뛰어 넘어 반 아이들을 마음속에 품고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는 기도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실제로 ‘이상한’ 아이중 한명은 그 이후 조금씩 나에게 신뢰의 표현을 보이기 시작했고, 장난의 형식이지만 내 관심을 더 끌려고 하는 듯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표현 방법이 엉뚱하지만 이제 조금씩 서로 마음을 열어가는 단계에서 이를 잘 핸들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교사의 역량은 바로 이때 나타나는 것 같다. 마음이 열렸으니 행동 양상이나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에 개의치 않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끝까지 사랑을 배풀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사랑을 준다는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나이가 서른이 가까워져 가는 나 조차 중학생 아이들에게 언제 상처를 받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사랑 주는 인생’이라는 나에게 두신 하나님의 마스터 플랜의 한 과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어떤 상황이라도 극복할 수 있는 이유가 나에겐 있다. 오늘도 하나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You’re gonna be living a love-giving life.”


2005년 4월 16일

가치란 무엇인가?

나는 최근 취업을 준비하면서 가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회에 진출하고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사회 속에서 나만의 위치를 설정하고 사회 속에서의 존재 이유를 발견한다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사회에서의 나의 존재 가치를 생각해 보기에 앞서 과연 가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필요했다. 물론 나 개인의 근본적인 존재의 이유와 가치는 확신하고 있지만 이 사회 속에서의 존재 이유와 나만의 고유한 가치는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가 없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가치라는 말에 대하여 묵시적인 이해를 하고 있다. 무언가 추구해야 할 것, 또는 값어치 있는 것. 하지만 어떤 관점에서 가치라는 단어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천차만별이다. 국어 사전은 가치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인간의 정신적 노력의 목표로 간주되는 객관적 당위’ 또는 ‘어떤 대상에 대한 인간 주체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것이 가지는 의의’. 모두 철학적이고 머리 아파 보이는 표현인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게 필요한 가치라는 것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국어사전의 가치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었다.

국어사전이 말하는 가치의 첫 번째 의미는 ‘인간의 정신적 노력의 목표로 간주되는 객관적 당위’이다. 한마디로 말해 가치란 인간의 정신적 노력의 목표이다. 좀 더 객관적으로 본다면 가치란 인간의 노력의 목표이다. 그러고 보면 모든 사람들은 어떤 노력을 할 때 목적을 갖고 한다. 그 목적 자체가 ‘가치’라면 나는 가치를 모든 개인과 조직의 내면에 작용하는 중력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그 중력의 방향에 따라 사람의 사고와 행동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지구 중심을 향하고 있는 중력으로 인해 지구상의 모든 사람과 물체는 알든 모르든, 좋든 싫든, 지구 중심을 향하고 있다. 내가 나의 내면에 작용하는 이 중력의 방향을 내 의지대로 설정할 수 있다면 당연히 나는 올바른 방향으로 설정해야 한다. 일단 중력의 방향이 올바르게 설정되고 나면 나는 내가 모르는 중에도 내 생각과 행동은 저절로 그 중력의 방향을 향해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이 중력에는 여러 차원이 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변함 없이 지켜야 할, 지구의 중력과도 같은 근본적인 가치가 있다. 하지만 사회 생활을 함에 있어서 이 근본적인 가치 못지 않게 중요한 가치는 매일 단기간의 내 삶의 방향을 설정해 주고 이끌어 주는 중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매일 아침 회사에 출근하고 책상 앞에 앉았을 때 내가 움직여야 할 방향이 확실하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을 찾고 추진하는데 별다른 고민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내 역량에 따라 그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력의 방향이 계약의 성공이 될 수도 있고 제품의 성공적인 개발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좀 더 추상적으로 고객에게 최대의 만족을 돌려주는 것 또는 고객과 회사가 동시에 발전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가치가 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원칙주의를 강조하고 윤리와 정직을 강조하지만 모든 것은 개인과 조직의 내면에 흐르고 있는 가치를 철저히 지향할 때 저절로 지켜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루하루 일할 수 있는 원동력, 나아가 삶을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 바로 이 중력인 가치인 것 같다.

국어 사전이 말하는 가치라는 단어에 대한 두 번째 정의는 어떤 대상에 대한 인간 주체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것이 가지는 의의이다. 이 정의에 의하면 가치가 존재하기에 앞서 관계가 성립이 되어야 하고 이러한 관계는 그것만의 고유한 가치를 갖는다. 이런 면에서 나의 근본적인 존재 가치는 올바르게 정립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근본적인 존재 가치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또한 관계라는 측면에서의 가치의 의미는 내가 사회인으로서 어떤 가치를 지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해준다. 일단 내가 사회에 나갔을 때 가장 먼저 맺게 되는 관계는 기업과 나의 관계이다. 외형적으로 볼 때 그 관계는 ‘고용’이라는 개념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지만 나는 그 관계 안에서 좀더 고차원적인 가치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과거의 나 자신이나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어떤 회사나 조직에서 일을 할 때 항상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갖고 일을 한다. 근무 조건이 안 좋아지거나 조금이라도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되면 불평 불만이 쏟아져 나오고 결국 상황이 허락할 때는 일을 포기하고 그 조직을 벗어나 버린다. 유난히 한국에서 ‘투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불법 파업이 많이 일어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요즘 신문이나 뉴스에서는 젊은 사람들일수록 이런 경향이 심하다고 한다. 나는 이런 결과의 원인이 자기 자신과 기업과의 관계에서 가치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존경하는 CEO인 안철수씨는 기업은 생명체와 같다고 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기업이 지향하는 핵심 가치는 기업의 모든 구성원들과 공유, 공감되어야 하고 그랬을 때 이 생명체는 영속할 수 있다. 두 주체가 같은 방향, 같은 흐름의 중력을 가지고 있을 때 그 관계에는 높은 가치 형성되고 양쪽 모두 건설적인 방향으로 스스로를 이끌어갈 수 있다.

사업을 경영하는 사람이 아닌, 그것도 아직 사회에서 제대로 된 걸음마조차 떼지 못한 내가 가치를 이야기한다는 게 어불성설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모순들을 볼 때 분명한 가치관과 어느 정도 공통적인 가치에 대한 이해는 이 사회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기업들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요소가 아닌가 싶다. 사실 나 역시 가치가 무엇이고 왜 중요한지 명확하게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회 진출을 앞두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사회 안에서의 올바른 가치관을 찾고 발견하기 전에 먼저 가치가 무엇이고 왜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이해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제 이 사회 안에서의 가치관을 찾고 정립하는 것은 이 사회 속에서 고유한 역할을 담당해야 할 나에게 주어진 하나의 숙제이다.


– 2004. 12. 30. 송형기

비오는 날엔

2003년 6월 23일 (흐리고 비)

세월이 지날수록 빛바랜 사진처럼

기억 저편으로 멀어지지만

빛바랜 사진 한장조차 남기지 못한

진한 아쉬움으로

기억의 저편에서 다시 조각되어 지는

첫사랑의 기억….

아니 이제는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