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성탄 데코레이션

2005년 12월 13일…..


교회에서 성탄 데코레이션을 섬겼습니다. 처음 사랑의교회에 왔을 때 대형교회에서 내가 뭐 할 일이 있겠냐 싶었는데 중등부 교사를 하면서 이 교회라는 커뮤니티의 한 구성원이라는 소속감과 안정감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교회가 존재하는 첫째 의미가 이것이 아니지만 여러 사람들이 한 공동체 안에서 하나됨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고 이 땅에서의 작은 하나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중요한 교회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몇 년 전에 교회의 존재 의미에 대해서 혼자 많은 고민을 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때 읽었던 헨리 나우웬의 책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 이란 책에서 책의 저자가 정의하는 교회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그것도 하나님의 교회란 한없이 크고 한없이 작다. 그토록 크므로 겸손한 자들이 와서 높임 받는 곳, 그토록 작으므로 높은자들이 낮고 낮아져야 들어올 수 있는 곳, 교회란 실로 이와 같다 – Henri Nouwen






사랑의교회 중등1,2부 교사 9다락방 동역자들과 함께…

소그룹 (공동체) 생활과 우울증

이 글은 헨리 나우웬의 책 친밀함 (Intimacy Henri Nouwen) 103~108페이지에 걸쳐서 언급되는 소그룹 생활과 우울증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원래 책에서는 이 부분이 신학교 안에서의 우울증과 딜레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이라 내용이 전체적으로 신학교 안에서의 소그룹에 대한 문제를 진단하고 있는데 요즘 대부분의 교회들과 일부 대형 교회들의 목적성 있는 소그룹 (또는 특별한 사역을 위한 소모임 등)에도 충분히 적용되는 내용이라 생각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소그룹에 대한 고정 관념을 인간이라는 독립되고 가치 있는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함으로써 재발견하고, 쉽게 빠질 수 있는 몇 가지 문제들을 진단해내고 있습니다. 일단 이 부분에서 문제점들을 찾아내긴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책의 다음 장(이 요약 본에 없음)에서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아래 글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소그룹의 어찌 보면 당연한 모습을 저자는 잘못된 모습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같은 저자가 자신의 책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에서 이야기하는 교회의 모습과는 또 모순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저자가 원래 언급했던 내용이 신학교라는 집단 내에서의 소그룹을 이야기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성숙한 사람들의 모임, 특별한 목적이나 훈련을 위해 모이는 소그룹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 보시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2005. 12. 6. 송형기


 



 









 



소그룹 생활과 우울증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소그룹 또는 팀은 수직적인 관계로 인한 비인격적 생활에 대한 반작용으로 볼 수 있다. 큰 집단을 작은 팀으로 나눔으로써 진정한 형제애의 가능성을 창출하며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생활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대화와 토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부분에서도 언제나 상황은 뜻한 방향대로 움직이지 않는 법이다. 팀 방식이 안고 있는 문제를 크게 세 가지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문제는 구성원들이 더 이상 서로 피할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소그룹들의 자생 터전이 되는 큰 집단에서는 못마땅한 사람들을 피하고 생각이 다른 이들과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모임에도 비교적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다. 반면 팀에서는 소수의 동료들과 아주 가까울 수밖에 없다. 내가 하는 많은 행동은 팀원들의 비판의 눈을 벗어날 수 없으며 거꾸로 팀원들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팀 모임에 가지 않으면 금방 눈에 띌 뿐 아니라 그룹에 대한 흥미나 헌신 부족이라는 질책을 받게 된다. 모임 중에 말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내가 침묵하는 이유를 알려고 한다. 내가 행하거나 행하지 않는 모든 일들에 개인적으로 깊은 의미가 부여될 수 있다. 그러므로 팀 생활은 분명 대단위 집단 생활보다 요구하는 것이 훨씬 많다. 훨씬 높은 성숙이 필요한 것이다.



 



둘째 문제는 팀의 의미에 대한 혼란과 관련이 있다. 일반적으로 팀이라는 말은 다양한 장정의 융합을 통해 특정한 과제를 더 훌륭히 수행할 수 있는 소수 사람들의 협력을 일컫는 말이다. 팀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은 팀원들의 공통 과제다. 팀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면 그것이 업무의 질에 그대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람을 양성하는 상황에서는 팀이 과제 지향적이 되지 못할 때가 많다. 이 경우 흔히 구성원들이 기대하는 팀은 팀원들에게 최선의 생활 조건을 제공하는 곳이다. 마치 바쁜 하루를 보내고 난 뒤 돌아가는 가정과 비슷하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시작된다. 팀이 과제 지향적이 아니라 자아 지향적이 되기 십상이므로 이제 팀의 문제는 수행해야 할 일의 본질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대인 관계의 본질 때문에 생겨난다. 이 경우 팀 모임은 다분히 아마추어 그룹 치료로 전락하기 쉽다. 팀원들은 서로를 향한 감정을 탐색하려 하며, 혼자 간직하는 것이 훨씬 좋을 많은 문제들까지도 털어놓으라고 부추긴다. 그렇게 되면 팀 모임에는 긴장이 팽배할 수 있다. 개인 문제를 벗어나 공통 관심사로 나아가지 못한 채 자아 중심으로 치닫다가 자아 도취의 경지까지 이를 수 있는 것이다.



 



퇴행이 전혀 허용되지 않는 문화는 사람들을 파멸에 몰아넣을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인간은 잠자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일은 잠든 동안에 일어나지 않는다. 우는 것,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 사랑과 미움의 감정을 숨김없이 표현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 건강에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것은 다 진보가 뒤따를 때에만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일시적 퇴행인 것이다. 형성기에는 퇴행을 허용해야 하며 때에 따라서는 권유할 필요도 있지만, 퇴행이 추구의 이상으로 간주되어서는 절대로 안된다. 어디까지나 이상은 자아에 집착하고, 울고, 내 감정을 다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내 문제를 잊고 내 관심과 주의를 요구하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퇴행적 행동 양식을 장려하는 팀은 본연의 목적을 거스르는 셈이다.



 



여기서 팀의 마지막 문제가 발견된다. 친밀함과 관련된 것이다. 사춘기 아이들과 청년들은 아주 괴로울 정도로 깊은 외로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는 진이 빠질 정도로 상대에게 매달리는 우정을 통해 이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는 성향이 있다. 이것은 원초적 필요에 바탕을 둔 미숙하고 집착적인 우정이다. 소그룹의 과제는 이들을 깨우쳐 이런 충동적 필요에 더 이상 끌려 다니지 않고 성숙한 자기 인식과 자기 확신에 이르게 해주는 것이다. 그럴 때 우정은 나누고 용서하는 관계로 자라날 수 있으며, 외로운 감정도 성숙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팀을 원초적 필요와 욕심에 따라 움직이는 일개 파벌로 전락시키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많은 구성원들이 스트레스가 무척 심해 친밀함의 집요한 욕구에 이끌려 친구들에게 매달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개 비현실적인 환상만 자극할 뿐이다.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친구가 어디선가 날 기다리고 있다가 내 모든 좌절감을 해소해 줄 것이라는 환상 말이다. 팀이 이런 비현실적인 친밀함의 욕구를 채워 주는 방편이 된다면 오히려 큰 해가 될 수 있다.



 



이렇듯 팀이란 그 책임자들의 특별한 주의가 필요한 아주 특수하고도 정교한 사역이다. 최대의 위험은 과제 지향적인 팀이 자아 지향적인 오합지졸로 전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집착적 관계는 구성원들의 정신력을 고갈시키며 퇴행 행동까지 부른다. 이런 상황에서 구성원들은 성격이 까다로워져 곧잘 따지고 쉽게 짜증낸다. 인간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관심을 요구하고 인간이 보일 수 잇는 것보다 더 깊은 동정을 바라는 성향이 나타난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건강의 정도를 넘어선다. 구성원은 자신의 고독을 아주 미묘하게 즐기며 그야말로 버릇없는 아이의 전형적 증상을 보이게 된다.



이런 퇴행 행동에 뒤따르는 가장 보편적이고 전염성 높은 증상이 바로 우울증이다. 그것은 아무도 날 이해하지도 사랑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느낌이요, 묘하게 뒤범벅이 된 애증의 대상들에게 동정을 얻고 싶어하는 욕망이다.



 



이렇듯 소그룹 생활은 의도와는 정반대로 아주 우울한 생활 방식으로 쉽게 변질될 수 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런 감정들이 대게 너무 모호하고 삶 전반에 확산되어 구성원들 자신은 물론 책임자도 문제의 근원을 여간해서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자존심과 자존감







자존심과 자존감


- 이응도 목사 / 필라델피아 초대 교회



개인적으로 제가 자녀 교육에 있어서 가장 크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자존감’에 대해서입니다. 이것은 자존심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자존감이란 ‘가치’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끼는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과 존재에 대한 자부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살아온 삶과 앞으로 걸어갈 길에 대한 든든한 자부심은 긍정적이고 당당한 자아상을 만들어냅니다. 그 건강한 자아상에 근거하여 살아갈 날들에 대한 밝은 전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우리들은 자존심에 집중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우월을 느끼기를 좋아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다음의 다섯 가지에 근거해서 자존심을 세우려 합니다.

첫째는 ‘소유’입니다. 누가 더 많이 가졌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판단의 근거입니다.

둘째는 ‘성취’입니다. 개인의 삶에 대한 업적 중심의 평가는 유혹적입니다.

셋째는 ‘직책’입니다. 업적과 직책은 사람의 명예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높아지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업적과 명예는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넷째는 ‘외모’입니다. 외모는 현대 문화를 이해하는 열쇠와도 같습니다. 보다 아름답고 섹시한 외모는 다른 사람에 대한 자존심의 근거가 됩니다.

다섯째는 ‘인간 관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소속감을 가지기를 원하고 자신이 맺고 있는 인간 관계를 통해서 자신을 설명하거나 해석하려 합니다. 그 속에서 동질감을 느끼려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상대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얼마든지 변할 수도, 사라질 수도 있는 것들입니다. 자존심에 근거한 자기 평가는 늘 불안할 수 밖에 없고 흔들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자기 가치가 필요합니다. 상담을 하면서 가장 어렵고 힘든 피상담자들은 바로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입니다. 잘못된 삶을 살아도, 자신 때문에 가정에 상처와 아픔이 남아도 자신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비난 받을까 잠시 자존심이 상해서 분노하고 책임을 돌리기도 하지만 결국 다시 무책임하고 질서 없는 삶으로 돌아갑니다. 자기 자신에게 부여한 가치가 낮기 때문에 다시 그런 삶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지도, 부담스러워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한 사람, 한 사람은 참으로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 존재가 충분히 존중 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가치를 잃어버리는 방식으로 살기도 합니다. “우리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지불하고 살만큼 가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가치대로 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가치를 더욱 빛내며 살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과 이 세상에서 참으로 소중한 존재이니까요….


자존감에 대한 정의

자존감이란 개인이 자신의 특성과 능력에 대해 지니고 있는 생각, 판단, 감정 및 기대를 포함하는 개념으로서, 인간 내면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자신에 대한 가치평가이다. 이 자존감에는 두가지 요소가 있는데 하나는 여러 가지 일을 해 낼 수 있다는 자기 능력감이고, 또 하나는 자신이 행복해질 가치가 있다는 자기 가치감이다. 따라서 이 자존감은 우리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행복감을 느끼는 일에 직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부부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대인관계에도 영향을 끼친다.






자존감은 자라면서 가족과 친지, 학교 선생님이나 친구등 주변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형성된다. 즉 자신에게 중요한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이 사랑받고 가치있는 존재임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며, 이것이 자존감 형성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흔히 듣는 말로 사랑받으면서 큰 아이 사랑할 줄 알며 비난받으며 큰 아이 비난밖에 할 줄 모른다는 말은 바로 이 것이다. 비난받으며 큰 사람은 낮은 자존감을 형성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자신이 가치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남을 비난하고 남이 잘못했다고 생각해야 상처를 덜 받고 숨을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자존감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또다른 요인은 사회적 가치관과 성격적인 영향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의 가치가 개인의 지능, 신체적인 매력, 교육, 재력, 권력 그리고 성취도에 따라 좌우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성공의 상징을 소유하면 자존감이 높아지기도 한다.

부시 대통령의 멋진 발언



“My hope is that the government of China will not fear Christians
who gather to worship openly” – 2005, George W Bush


APEC 정상회담이 끝난 후 중국, 몽골 방문길에 오른 부시 대통령이 지난 주일 북경의 한 개신교 교회에서 예배를 마친 후 한 발언이다. ‘난 중국 정부가 공개적으로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는 기독교인들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란다.”
중국 정부의 종교 압박 정책을 그들이 크리스천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상황을 180도 반전시켜 버린 멋진 발언에 이어 후 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을 만난 자리에서는 이런 발언을 했다.







“It’s important that social, political and religious freedoms
grow in China and we encourage China to continue
making their historic transition to greater freedom” – 2005, George W Bush




부시는 이 말에서 사회, 정치의 자유 뿐 아니라 기독교의 자유를 ‘더 큰(위대한) 자유’라고 정의했다. 번역하자면  “사회, 정치 그리고 종교의 자유가 중국에서 더욱 자라나야 하는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우리(미국)는 중국이 더 큰 (위대한) 자유로의 역사적인 변화를 계속 만들어 나가길 바란다.” 기독교적인 가치관으로 정치를 하는 그가 몇가지 깊은 오점을 남기긴 했지만 그래도 말 하나 하나가 여전히 힘이 있고 흔들리지 않는 기준이 있는 것 같다. He’s cool..!


2005. 11. 21. 송형기
발언 내용은 아래에서 참조함.
http://www.washingtonpost.com/wp-dyn/content/article/2005/11/19/AR2005111901286.html

최덕신 집사 복귀, 하나님의 감격도 생각해야

본 사설은 ‘크리스천 투데이’ 에서 아무런 수정 없이 Copy-Paste했습니다.
2005년 8월 8일자 기사
원본 주소: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oc_1760.htm


최덕신 집사가 최근 ‘최덕신의 주찬양’이라는 카페를 중심으로 소그룹 찬양모임을 시작하고 정기적인 기고도 하고 있어 최덕신 집사의 복귀 가능성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최덕신 집사는 지난해 아내가 간통혐의로 고소, 이를 이유로 모든 찬양 사역을 내려놓은 바 있다.

최덕신 집사의 복귀를 두고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찬반의견이 서로 엇갈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동안 최덕신 집사가 일궈논 교회음악 분야에서 그의 자리가 너무도 크기에 최덕신 집사를 기다리는 기독교인들도 상당수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치명적인 죄과가 있는 자들이 공식석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기독교인은 과거를 통해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그 사람의 미래가치를 인정하는 넓은 사고를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최덕신 집사가 비록 과거의 문제를 안고 있다 해도 그의 진심어린 회개가 뒤따른다면 우리는 최덕신 집사의 사역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일부는 찬양 사역자가 불륜 등의 죄를 저지른데 대해서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자 ‘기독교인에 대한 기롱’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순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미하고 은혜를 전해야할 자가 범죄한 몸으로 기독교인들을 인도했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라는 입장이다. 이 때문에 최덕신 집사는 영원히 사역자의 위치에 세워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죄를 위해 사용된 도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쓰여질 때에 더욱 감격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범죄로 더럽혀진 입술로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은 가증스럽다’는 시각도 있겠으나 ‘비록 과거에는 범죄를 위해 쓰여졌으나 이제는 하나님을 찬미하는데 쓰여진다’는 하나님의 감격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과거지향적 종교가 아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죄과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고 답하셨다. 기독교인이라면 여론에 밀려 함께 돌을 던지는 자가 되지 말고 미래를 통해 최덕신 집사를 바라보는 눈을 가져야 할 것이다.

또한 만일 최덕신 집사가 진정으로 찬양사역을 시작하고자 한다면 그의 과거에 대한 철저한 회개가 있어야 한다. 최덕신 씨는 문제가 된 부인의 글에 대한 명확한 해명을 아직 하지 않고 있으며 어느정도 사실로 밝혀진 과거의 잘못에 대해서도 충분한 고백없이 찬양사역을 시작하려는 모습이 엿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최덕신 집사는 스스로 공인이라는 자의식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며 이에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죄된 모습을 모두 청산하고 철저히 신앙의 본을 보이는 모습으로 거듭나야 하겠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최덕신 집사를 바라보고 있고 최덕신 집사의 삶과 행동들까지도 본 받고 싶어하는 이들이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2008년 8월 7일 수정:
최덕신과 관련된 검색어 입력으로 오시게 된 분들은 꼭 아래의 글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최덕신을 통한 한 없는 축복과 큰 도전 (http://www.wayiam.com/blog/171)

A Love-Giving Life

2005년은 나에게 있어서 여러가지 변화를 맞게되는 한해이다. 길고 길었던 학생이라는 타이틀을 떼고 경제활동을 하는 사회인으로 첫 발걸음을 내딛은 한해가 되고, 개인적으로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정리가 필요하기도 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2005년 2월 마지막주 부터 교회에서 중등부 교사로 봉사하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한 영혼에 대한 소중함과 그로 인한 부담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다시금 영혼을 살리는 일에 동참하게 되었다.
내가 주일학교 교사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된 이야기다. 대학교 학부 시절 열악한 환경 속에서 캠퍼스 복음 사역에 동참하고 찬양팀을 인도하며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신앙 안에서 많이 강한 사람으로 변화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모든것이 풍족한 사랑의교회로 옮기고 대학부라는 공동체에서 섬김만 받으며 있다 보니 어느새 영적인 긴장감은 풀어지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선명한 이미지는 점점 흐려지는 것 같았다. 그때 부터 기도를 했던 것이 주일학교 교사였지만 역시 무언가를 결단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2003년부터 교사에 대해 생각이 있었다. 2003년 가을에는 교회에서 하는 교사 훈련원에 등록해서 훈련도 받기도 했지만 2004년 초 호주 연수를 핑계로, 그리고 그해 말에는 대학원 논문을 핑계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피하기만 했다. 언제나 그렇듯 마음은 편하지가 않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 어느때보다 확실했다. 마음으로 밀려오는 부담감을 더이상 피할 자신이 없어 아직 적응조차 하지 못한 직장 생활에 대한 부담감을 떠안은 채 중등부 교사에 자원을 했다.
처음 교사를 시작하면서 맡은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는 한마디로 한창 까부는 아이들이다. 특히 우리반 아이들 중에는 다른 선생님들도 인정하는 ‘이상한’ 아이들이 둘씩이나 있다. 말과 행동을 보면 기본적으로 반항 기질이 있는 것 같다. 이런 아이들을 앉혀놓고 말씀을 가르치고 말을 시키고 올바른 대답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어 보였다. 이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쉽사리 생기지 않았다. 기도를 하고자 해도 기도 역시 되지 않고 교회에서 만날때는 일단 한숨부터 나오는 상황이었다.
4월 5일은 중등부 전체가 옛날식으로 가족 운동회를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우리반 학생들은 전원 나오지 않았다. 회사가 갑작스럽게 바쁜 상황에 내가 응원 단장 역할까지 하게 되어 아이들을 챙기는게 쉽지가 않았는데 막상 운동회에 아이들이 나오지 않으니 처음으로 아이들에 대한 섭섭한 마음과 미안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날 운동회가 끝나고 교회 기도실에서 기도를 하며 아이들이 단 한명도 나오지 않기까지 아이들에게 관심가져 주지 못한 것에 대해 회개 기도를 하면서 답답한 마음을 쏟아놓았다. 다른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고 품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두번씩이나 사랑하는 사람으로 부터 거절당한 후, 다른 사람을 절대로 먼저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까지 했던 상황에서 역시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다. 이 글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마음속의 상처는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데 많은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기도실에서 기도를 하며 얻게된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사랑을 주는 것은 너의 은사다. 내가 너를 사랑 주는 인생으로 빚겠다.’ 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너무 분명히 말씀하시는 이 하나님의 약속의 음성에 확신을 갖게 되면서 그때 부터는 마음 속의 상처를 뛰어 넘어 반 아이들을 마음속에 품고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는 기도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실제로 ‘이상한’ 아이중 한명은 그 이후 조금씩 나에게 신뢰의 표현을 보이기 시작했고, 장난의 형식이지만 내 관심을 더 끌려고 하는 듯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표현 방법이 엉뚱하지만 이제 조금씩 서로 마음을 열어가는 단계에서 이를 잘 핸들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교사의 역량은 바로 이때 나타나는 것 같다. 마음이 열렸으니 행동 양상이나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에 개의치 않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끝까지 사랑을 배풀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사랑을 준다는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나이가 서른이 가까워져 가는 나 조차 중학생 아이들에게 언제 상처를 받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사랑 주는 인생’이라는 나에게 두신 하나님의 마스터 플랜의 한 과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어떤 상황이라도 극복할 수 있는 이유가 나에겐 있다. 오늘도 하나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You’re gonna be living a love-giving life.”


2005년 4월 16일

이른 새벽 오히려 미명에…

지난주 우리 교회에서 갑자기 40일 새벽 집회를 시작했다. 전혀 계획에도 없던 것이다.
새로 부임하신 오정현 목사님이 주일 첫 설교를 하시기도 전에 새벽기도회가 부흥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주간 새벽기도 참석 인원이 200명정도에서 2000명으로 갑작스럽게 늘어나면서 기도회 장소도 별관에서
넓은 본당으로 옮겼고…

그렇게 40일 특별 새벽집회가 시작되었다. (교회에서는 제 1회라는 말을 쓰는걸로 봐서 매년 지속적으로 할듯…)
나 역시 첫날인 월요일부터 나가기 시작해서 지난주 3번 참석했다.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안양까지 가서 친구를 태우고 다시 강남에 있는 교회로…
정말 놀랍고도 이상한…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 5시 10분에 집회 시작인데
새벽 5시도 되지 않은 시간에 본당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서 별관으로 가야 했다…
새벽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정말 놀라웠다. 그동안 막혀 있었던 기도의 문이 열리고 삶의 변화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주일동안 3번을 참석하고…. 지난 한주는 마치 꿈속을 걷는듯 했다.
삶과 신앙에 무언가 굵은 마디를 만들어 가고 있는것 같다. 세상과 어린 학생들을 향한 부담감…
이젠 그저 머리 속에만 머물러 있던 말씀이 아닌 실천하는 신앙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