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해외선교도 이제는 분업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날이 가면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사람들이 하는 일도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는 경향이다.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하던 신종 직업들이 새로 생겨난다. 지금까지 혼자 해 왔던 일들이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이 세분화되면서 발생한 일이다. 이를 일의 분업화(分業化)라고 한다. 따라서 지식과 기술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일의 분업화는 더 한층 가속화되는 것이 오늘의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지부동(搖之不動)인 영역(領域)이 있다. 세상이 변하고 사람들이 하는 일이 여러 가지로 다양해지고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고 있는 영역이다. 그게 어떤 영역이라고 생각하는가? 바로 한국교회의 해외선교현장이다. 사회가 다양화되어 제 아무리 복잡하고, 일의 분업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지만, 한국교회가 파송한 해외선교현장에서는 여전히 한 사람의 사역자에게 만능의 재주가 요구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우리나라가 글로벌 시대의 지구촌에 우뚝 솟은 선교대국이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다. 미국교회 다음으로 지구촌 방방곡곡에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했다. 불과 선교 200년이 훨씬 미치지 않은 상황에서 일궈낸 엄청난 쾌거이기에 얼마든지 자랑할만 한 일이다. 그러므로 지금 세계교회는 한국교회를 크게 부러워하고 있다. 따라서 지구촌 어느 곳에서도 한국교회가 파송한 사명자는 대체적으로 환영을 받는다.


그렇지만 아쉬운 것이 있다. 한국교회가 지구촌에 파송한 대부분의 사명자들은 아직도 오늘날과 같이 다양성의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시대에 역행(逆行)하는 삶을 살거나, 살기를 강요받고 있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에게서는 선교사역의 분업화를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다. 서로가 협력을 기대하면서도 가장 협력이 되지 않고 있는 영역이 있다면, 그곳은 곧 한국교회의 해외선교현장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다.


만일 한국교회가 해외선교현장에서 여러 사명자들이 서로 일을 나누어 분업화한다면 얼마든지 사역의 효율을 높일 수 있다. 따라서 많은 사명자들이 이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어느 한 사람 이런 일을 반대하거나 부정하는 이들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국교회의 해외선교현장에서는 여러 사명자들이 각자의 일을 적절하게 나누어 분업화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차라리 전혀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왜, 한국교회의 해외선교현장에서는 사역의 분업화에 대한 필요를 느끼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일까? 누군가 자기를 위해 일해주기를 원하면서도 자신은 다른 이를 돕는 일에 인색한 탓은 아닐까? 그래서 다른 이들과 나누어 분업화하면 아주 쉽고 재미있게 감당할 수 있는 사역을 홀로 감당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참으로 한국교회의 해외선교현장에 있는 사명자들이 사역을 고달프고 힘들어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은 아닐까?


선교현장에서 사명을 감당하려고 몸부림치는 사명자에게는 누구인가의 도움이나 협력이 아주 중요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만 가지 재능을 가진 것이 아니기에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도우며 협력하는 일이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도 그 일이 쉽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왜 나홀로 만능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일까? 모든 일을 혼자의 힘으로 다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일까?


물론 일부 해외선교현장에서는 현장의 특정상 다른 이와 일을 나눌 수 없는 특수한 상황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각자 개인의 신분보호를 위해 삼가 조심해야 할 충분한 이유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너무 무리하게 일을 나누어 분업화를 시도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한국교회의 해외선교현장에서 지나친 경계와 몸사림이 서로가 일을 나누는 분업화를 엄두도 못내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보았기에 아쉬움이 얼마나 컸던지 모르기에 하는 말이다.


  정말 몸을 사리는 것만이 보안(保安)일까? 그 문제로 다른 사명자들과 교류를 끊고 혼자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만 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왜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것일까? 왜 서로의 교류가 보안에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겁을 내는 것일까? 내가 경험한 대부분의 경우는 적절하지 못한 변명이었다. 차라리 핑계라고 여겨질 정도로 지나치게 서로를 불신하며 일을 나누어 분업화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물론 다른 이들과 일을 나누어 분업화하는 것이 자칫하면 필요 이상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게 될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해외선교현장의 사명자가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나 홀로 몸부림쳐야 하는 일은 적절치 못한 행동이라는 생각을 털어 버릴 수가 없다. 이런 일로 인하여 오랫동안 선교현장에서 일할 수 있었던 이들이 너무 쉽게 지쳐서 사역을 포기하고 귀국하는 이들도 적지 않게 보았기 때문이다.


좀 더 자신을 비워야 한다. 특히 해외선교현장에서 사역을 감당하려면 자신을 철저하게 비우지 않으면 다른 이들과 일을 나누어 분업하기란 하늘에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제자들을 전도대로 파송하실 때에 둘씩 짝을 지어 보내시면서 ‘너희는 뱀과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신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깊이 묵상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이들과 더불어 일을 나누어 함께 감당하고자 하는 마음을 키워야 한다.


본디 협력(協力)이란 자기 중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기가 중심이 되는 것은 협력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목적과 뜻을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는 의도일 뿐이다. 이런 경우에는 자기를 도와 자신의 목적과 뜻을 이뤄줄 사람을 고용(雇用)하거나 다른 사람을 자기에게 복속(服屬)시키는 일이 된다. 결국 다른 이를 자기 목적을 위해 강제로 일을 시키는 것이 될 뿐이다.


이런 일은 해외선교현장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이다. 한국교회로부터 해외에 파송된 사명자는 선교현장의 지배자가 아니다. 그들을 아무도 선교현장에서 군림하는 지배자나 감독자로 세우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선교현장의 백성들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파송된 일꾼이다. 그렇다면 사람을 섬기는 일이란 나홀로 독불장군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독불장군은 결코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없다. 오히려 자칫하면 군림하는 오만한 태도로 나타날 뿐이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하나님께서 주신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어떤 영화에서와 같이 슈퍼맨이나 원더우먼처럼 초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는 맥가이버와 같이 다재다능한 만능의 재주를 가진 것도 아니다. 그냥 좋아하면서, 그래서 다른 어떤 일보다 비교적 재미 있고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달란트라고 지칭하기도 하는 재능이다.


그렇다. 참된 협력이란 사람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자신의 달란트, 즉 재능을 서로를 위해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국어사전에서는 이것을 ‘어떤 일을 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 또는 어떠한 일을 하는 데에 여럿이 서로 힘을 합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일들이 해외선교현장에서 일어나야 한다. 한 개인에 의해 고용(雇用)되거나 복속(服屬)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자발적인 의지에 의해 서로가 일을 나누어 분업화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해외에 파송한 선교현장의 사명자들이 서로가 일을 나누어 분업화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일이 사명자 한 사람만의 이유일까? 아니다. 오히려 한국교회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왜냐하면 한국교회의 철저한 개교회주의와 독단이기주의적인 실적에 대한 과도한 욕구가 해외선교현장의 사명자들로 하여금 다른 이들과 더불어 일을 나누어 분업화하려는 것을 방해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해외선교현장에 사명자를 파송하고 그들이 마치 슈퍼맨이나 원더우먼라도 되는 양 지나친 실적을 요구하는 경우가 너무 흔하다. 마치 선교현장의 사명자라면 맥가이버처럼 무엇이든지 혼자서 가능한 마이더스의 손을 가진 재주꾼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일들이 결국 해외선교현장의 사명자들에게 무언의 압력이 되고, 이것이 결국은 다른 이들과 더불어 일을 나누어 분업화하는 것을 원천봉쇄하게 하는 일이 될 수 있음을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참으로 해외선교현장의 사명자들은 숨돌릴 사이도 없이 바쁘기 무엇인가 끈임없는 일을 해야 한다. 이는 그들을 파송한 실적을 한국교회가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한시도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없다. 눈코 뜰새 없이 분주하게 이리저리 뛰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많은 사명자들이 정신없이 이리저리 뛰어 다니다보면 지금 자기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가 될 때도 많다.


정말 해외선교현장에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사명자들은 만능의 재주꾼이어야 할까? 해외선교현장에서 어떤 일에 닥치든지 모든 일들을 소화시켜 감당할 만한 자격이 채워져야 하는 것일까? 한 가지 재주만으로는 사명자로서 부적격자가 되기라도 하는 것일까? 그래서 해외선교현장에서는 일을 서로 나눠 분업화하는 일이란 불가능한 일이요, 더 나아가 아예 불필요한 일이 되는 것이기라도 하는 것일까?


한국교회의 해외선교현장에서는 사역의 세분화를 통한 분업화가 이루워져야 한다. 어쩌면 이것은 시대적인 요청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바른 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국교회는 이 일을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만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건만, 도무지 변화할 줄 모른채 구습에만 젖어 있는 모습이다. 사역의 세분화 속에서 서로가 다양한 재주들이 상호존중되어 일어나는 선교사역의 분업화는 시급한 시대임을 모르고 있는 듯하다.


한국교회로부터 해외선교현장에 파송된 사명자가 해야 할 일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다. 물론 그가 해야 할 일은 그를 파송한 어떤 단체나 교회 등 집단의 이익을 위한 일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기 위해 필요한 일일 뿐이다. 그렇다면 더욱 다른 이들과 일을 나누어 분업화해야 한다. 분업이란 어쩌면 가장 단순하고 쉬운 것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기만 하면 가능한 일을 더 이상은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분업을 거창하게 이해할 이유는 없다. 개인을 위한 일이 아니기에, 자기를 파송한 단체나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도 아니기에, 정말 하나님을 위한 일에 어찌 서로 일을 나누어 분업하지 못할 이유가 존재할 수 있으랴. 자신을 파송한 단체가 다르다고, 그들의 요구가 서로 다르다고 해외선교현장에서 사명자들이 서로 외면한채 협력하여 분업하지 못한다는 변명은 어쩌면 부끄러운 핑계에 지나지 않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교회가 해외선교현장에 파송한 사명자는 대부분 성경교사가 되는 것을 선호한다. 어쩌면 그것만이 해외선교현장에서 일하는 사명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고 있다. 그것만이 해외선교현장의 사명자가 해야 할 고유의 사명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교회를 개척하거나 신학교를 세워 현지인 지도자를 양성하는 일은 해외에서 일하는 사명자의 최우선과제라고 여긴다. 따라서 이 일을 성취하지 못하면 무능한 사명자라고 자책하게 된다.


과연 그럴까? 물론 해외선교현장에 파송된 사명자가 유능한 성경교사가 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전부는 절대로 아니다. 유능한 성경교사가 아니기에 교회를 개척하지 못하거나, 신학교를 세우지 못했다고 하여 자신을 무능한 사명자로 생각하는 일은 옳지 않은 일이다. 누구에게나 비록 유능한 성경교사로서의 재능은 없을지 모르나 하나님께 유능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미용기술로 선교현장에서 부지런히 머리만 깍아주거나, 또 다른 이는 자기의 기술이나 실력으로 현지인들을 돕는 작은 일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반드시 전문 기능인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현지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섬기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헌신된 자세와 마음으로 현지인들 가운데 빛과 소금이 되어 살아가는 삶이 곧 선교현장의 사명자가 살아가는 훌륭한 생활방식이 아닐까?


왜 한국교회는 해외선교현장에서 일하는 사명자들이 현지생활 속에서 현지인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생활인의 모습은 사명자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일까? 정말 이런 이들의 삶은 선교사로서 부적절한 것일까? 반드시 유능한 성경교사가 되어 현지인을 위한 교회를 개척하거나 신학교를 세워 섬기는 일만 선교사역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


참으로 한국교회는 해외선교현장에서 사명자들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이 서로가 서로를 철저하게 신뢰함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분업화가 이루어지도록 지원해야 한다. 단체를 따지지 말고, 교회를 따지지 말고, 같은 해외선교현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사명자들이 서로 하나의 네트웍을 이루어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 각자의 재능과 실력에 따라 자유롭게 현지인들을 섬길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되어져야 한다.


대체적으로 창의적 접근지역으로 분류되는 지역에서 일하는 사명자일수록 지나치게 서로를 경계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보안을 빙자한 경계가 안타깝게 여겨질 때도 많다. 만일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며, 자신의 달란트로 협력을 도모하면 더 풍성한 사역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만능을 추구하느라고 온 총력을 드려 지쳐가는 모습이 너무 안쓰럽기도 했다. 절대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여겨지기에 더욱 마음이 안타깝기도 했다.


해외선교현장에서 살면서 가장 효과적인 정보교환은 서로가 서로를 더욱 공고히 보호해주는 진정한 보호막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도하고 지나치게 다른 이들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는 격리주의야 말로 사탄의 책략에 걸려들기 쉬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파송한 해외선교현장의 사명자들도 사회가 다양하게 변하는 것처럼, 그래서 일의 분업화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선교현장에서도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모든 해외선교 사명자들에게 유능한 성경교사가 되어 교회를 개척하거나 신학교를 세우는 것을 기대하게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여 현지인을 자유롭게 섬길 수 있는 여건과 풍토가 조성되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협력하는 풍토를 이루도록 밀어주어야 한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해외선교현장을 더 잘 섬기는 비결이 됨을 알아야 한다.


진심으로 한국교회에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것은 해외선교현장에 대한 폭 넓은 이해에 근거하여 선교현장에서 살아가는 사명자들과 원만한 유대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선교현장에서 사명자들이 서로 신뢰하며 하나의 큰 네트웍이라는 밑그림을 그려갈 수 있도록 전적 신뢰로 가장 강력한 후견자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할 뿐이다.


한국교회는 단기선교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선교현장을 자주 방문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대부분이 선교현장에서 행하는 일들은 긍정적인 경우보다는 부정적인 경우가 더 많다. 이는 그동안 한국교회가 선교현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데서 오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해외선교현장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했더라면 피할 수 있었던 부작용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제 한국교회는 해외선교현장에 사명자를 파송하면서 그들에게 어떤 얕은 이벤트성 활동을 기대하거나, 당장의 효과를 전시적인 일에 대한 선호도를 땅에 내려 놓아야 한다. 그리고 선교현장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며, 현지사정에 맞도록 선교현장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명자들이 서로 협력하여 일을 나눔으로 분업화되는 일을 촉진시키는 일에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2007. 10. 25 (목)


글/ 불꽃 石一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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