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인터넷대란의 원인은 Slowris DDOS공격인듯…

오늘 2009년 7월 7일 네이버 메일을 비롯하여 청와대, 조선일보, 한나라당, 옥션 등 각 분야 1등이라고 할 수 있는 사이트들이 오후 6시~7시를 시작으로 접속 불가능한 현상이 6시간째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동시 다발적인 장애가 우연은 아닌것 같고.. 매우 상징적인 사이트들만 장애가 발생한 것으로 봐서 인위적인 공격에 의한 것 같습니다.

2~3주 전 아파치 웹서버가 DDOS에 취약점이 있다는 메일을 받았는데…
대략 내용은… 패킷을 천천히 보내면서 마치 정상적인 커넥션을 맺은 상태로 서버가 인식을 하게 한 상태에서..
미완성 HTTP헤더를 전송하는 방법으로 커넥션이 계속 대기 상태가 지속되게 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이전의 DDOS 공격과는 정 반대의 패턴으로 진행되는 공격에 별 힘도 써보지 못하고 그냥 무너지는것 같은 느낌이.. 2003년 인터넷 대란과 마찬가지로 이번 사태도… 7.7인터넷대란이란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까…–;




아래 글은 http://hackaday.com/2009/06/17/slowloris-http-denial-of-service/ 포스트 내용이고 그 아래는 제가 번역한 내용입니다.

[RSnake] has developed a denial of service technique that can take down servers more effectively. Traditionally, performing a denial of service attack entailed sending thousands of requests to a server, these requests needlessly tie up resources until the server fails. This repetitive attack requires the requests to happen in quick succession, and is usually a distributed effort. However, [RSnake]’s new technique has a client open several HTTP sessions and keeps them open for as long as possible. Most servers are configured to handle only a set number of connections; the infinite sessions prevent legitimate requests from being handled, shutting down the site. This vulnerability is present on webservers that use threading, such as Apache.


A positive side effect of the hack is that the server does not crash, only the HTTP server is affected. His example perl implementation, slowloris, is able to take down an average website using only one computer. Once the attack stops, the website will come back online immediately.

RSnake는 서버를 더 효과적으로 다운시킬 수 있는 DOS 공격 테크닉을 개발했다. 전통적으로 DOS 공격은 수천개의 request를 서버에 전송함으로서 진행했지만 이번 공격 방법에서는 서버가 죽을 때까지 서버의 리소스를 꽁꽁 묶어버린다. 이 반복적인 공격은 request가 짧은 순간에 연속적으로 보내져야 가능하며 보통 분산된 작업(여러 사람의 참여?)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RSnake의 새 기법은 HTTP 세션을 일단 열어 놓고 가능한 오랜 시간동안 유지시키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서버는 설정상 제한된 수의 커넥션만 처리하도록 설정되었다. 이 “무한 세션”은 정상적인 request가 처리되는 것을 막고 해당 사이트를 다운시켜버린다. 아파치와 같이 쓰레드를 사용하는 웹서버의 경우 이 공격에 대해 취약점이 존재한다.

이 해킹의 긍정적인 side effect는 서버 자체를 다운시켜버리는 것이 아니라 HTTP 서버에 대해서만 영향을 가한다는 것이다. 이 기법에 대해 Perl로 작성한 예제인 slowloris 를 사용하면, 일반적인 웹사이트를 단 한대의 컴퓨터를 사용하여 다운시켜버릴 수 있다. 공격을 중단하면 해당 웹사이트는 즉각 정상으로 회복될 것이다.


번역문을 사용하려면 출처를 밝혀주시길


Slowris 관련 링크:
http://hackaday.com/2009/06/17/slowloris-http-denial-of-service/
http://ha.ckers.org/slowloris
http://isc.sans.org/diary.html?storyid=6622
공격코드 http://ha.ckers.org/slowloris/slowloris.pl 



 

R.I.P. Michael Jackson you will be missed.

 


스타들의 죽음을 많이 보아왔지만 눈물을 흘린건 처음인듯..
90년대 고등학생 시절부터.. 한달 용돈 15,000원을 받으면 바로 동네 레코드샵으로 달려가서 그의 CD를 사서 듣곤 했다. 다른 가수들과는 달리 스타가 아닌 친한 친구같은 존재였는데.. 그날 아침에 일어나서 들은 소식은 너무 충격적이었다.

96년 그가 처음 한국에서 공연을 할 때 너무 가고 싶었지만
그때 고2였던 내가 그 티켓을 사기엔 너무 비싸서 못갔던 기억이 난다.
99년에도 못가고.. 결국은 그를 한번도 보지 못하고 그냥 이렇게 떠나보내는구나..ㅠㅠ

6월 26일 아침 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한가지 궁금해진 것은
배철수 아저씨가 음악캠프 저녁 방송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까… 였다.
안그래도 연초에 마이클 잭슨 베스트앨범 한국판을 내는데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주도적이었으니.. 뭔가 특별한 방송을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회사 업무가 7시까지였지만 6시에 인터넷으로 라디오를 들었다.
너무 고맙게도 임진모씨가 그날 오셔서 마이클 잭슨 특집 방송을 해주어서 너무 좋았다..

그날 다른 방송에서도 마이클 잭슨의 곡들이 많이 나왔는데..
역시나.. you are not alone이나 we are the world, i’ll be there 같은 조용하고 느린곡 위주로만 나왔는데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는 첫 오프닝곡으로 Thriller를 틀어줬다..!! (확실히 센스있는 나이스한 선곡..)

엘비스가 그랬고..
존 레논이 그랬듯이..
역사 속으로 그를 보내주어야겠지…





Rest In Peace Michael Jackson
You will be missed!


聖化

聖化의 문제..
From My utmost for his highest

Sanctification is not a question of whether God is willing to sanctify me— is it my will?

Am I willing to let God do in me everything that has been made possible through the atonement of the Cross of Christ?

Beware of saying, “Oh, I am longing to be sanctified.” No, you are not. Recognize your need, but stop longing and make it a matter of action.

All that Jesus made possible becomes mine through………. what??

He completed everything for my salvation and sanctification so..

관계 왜곡… distortion on relationships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왜곡된게 아닐까…? 아니.. 모든 사물과 피조물들은 왜곡되지 않은 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그리고 관계에서 생기는 많은 쓴뿌리들이 그들간의 관계를 왜곡시키고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마저 왜곡시키는것 같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12)

오늘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여자친구 집에 가서 같이 공부하면서 난 저녁으로 스파게티를 만들고… 같이 손잡고 기도하고 저녁 먹고… 또 공부하고 난 책 읽고.. 너무 행복했다. 자랑하려는건 아니지만 아무튼 이 순간 보다 더 좋은건 이 세상에 천국밖에 없을 것 같은 생각..ㅎㅎ 유치하지만 천국에 가서도 우리 둘만 사랑하며 지내고 싶다는 얘기들…

그리고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잠실역으로 와서 다시 버스로 갈아탔다. 30-3번 버스. 자리에 앉아서 30분정도 걸리는 집까지 버스를 타고 있는데 서계시던 어떤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눈에 띄었다. 아무말도 없이 1미터정도 거리를 띄워서 각자 서 있었기 때문에 난 당연히 모르는 사람일거라 생각했는데 자리가 하나 나자 아저씨가 아주머니에게 앉으라고… 말 없이 제스쳐로 이야기하는것 같았다. 그리고 아주머니가 조용히 그 자리에 가서 앉으셨고.. 그 두분은 나머지 시간동안 역시 아무 말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버스를 타고 가셨다.

그 두 분이 처음 사랑을 하고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함께 신혼 살림을 시작하면서도 그렇게 무표정한 얼굴로 말 없이 그렇게 지냈었을까..? 무엇이 그 두 분을 아무 말 없이 모든게 통하는… 그런 관계로 만들었을까.. 물론 버스 안에서 본 말 없는 대화와 무표정한 얼굴만으로 그 두 분의 관계를 절대 알 수는 없지만.. 세상 사람들, 사랑한다고 만나서 함께 사는 ‘두 사람’들의 관계가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두 사람 각자의 영혼과 그들간의 관계 자체는 이미 축복받고, 온전하고, 아름답지만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이지만) 하루 하루 세상을 살면서 생기는 오해, 상처 그리고 그런 오해와 상처를 드러내지 않음으로 인해 곪아버리는 일들이 반복되어서 결국은 마음의 눈에 스프레이 페인트를 뿌린 것같이 두 사람의 관계는 희미하게.. 음.. 또는 렌즈를 휘었을 때 보이는 것처럼 왜곡된 모습이 되는것 같다.

바로 옆에 있는 눈에 멀쩡하게 보이는 사람도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사람들마다 얼마나 다양하게 받아들이고 자기만의 이미지를 갖고 있을까? 설교에서 목사님이 ‘하나님’이라고 말하면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 모두의 마음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모두 다르겠지..? 천국에 들어가는 그날까진 하나님의 정확한 상(相)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지도 모른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이 말한 그 희미함. 내가 사람을 보는 눈, 하나님을 보는 눈 모두가 다 희미하다. 그래서 다를 수밖에 없고.. 그래서 더욱 겸손과 사랑이 필요한듯.. 바울이 고전13장에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 희미하에 대해 언급한 것이 그래서일까?

최덕신을 통한 한 없는 축복과 큰 도전

요즘 제 블로그의 referer 기록을 보니 검색 사이트에 “최덕신” 또는 그의 과거 허물과 관련된 원색적인 검색어를 입력해서 나온 결과에 노출된 제 블로그로 오시는 경우가 아직도 많다는걸 알았습니다.

2005년에 등록했던 블로그 글 주소
http://www.wayiam.com/blog/27 (새창)

방문하시는 분들의 검색 의도나 제 블로그에 달린 댓글을 보면 솔직히 안타깝습니다..
아직 우리 사회가 소위 ‘공인’이라는 부류의 사람들에게 너무 특별한 기대를 갖고 있는것 같습니다. 그들이 공인이기 이전에 예수님의 피를 나눈 한 형제라는 사실은 미처 떠올리지 못하는듯.. 그가 중세 수도사가 아닌 이상 우리를 대표해서 율법적으로 죄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만약 그가 정말 같은 가족이었더라면 어땠을지..? 그가 죄를 지었다는것 자체로 인해 그 사람 자체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의 판단은 일단 미뤄둔 채 안타깝게 생각하고 그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감싸주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판단과 정죄는 오직 예수님만이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 조차도 음행중에 잡힌 여인을 정죄하지 않고 죄 없다고 하셨다네요.. 이건 그에게나 저에게나 그리고 모든 분들에게 정말 기쁜 소식이 아닌가요.. (요 8장)

옛날 그에 대한 안좋은 소식이 퍼지기 시작한 것은 그와 관련된 한 분이 게시판에 올린 정말 감정적인 하소연하는 글을 올리고, 네티즌들에 의해서 퍼 날라지면서 부터 입니다. 요즘처럼 실명 인증을 거쳐서 글을 쓰는것도 아니었고 그 글을 쓴 사람이 직접적인 피해자인지 여부도, 그리고 감정섞였던 글이 얼마나 과장되었을지도 전혀 확인되지 않았는데도 일단 그를 매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통제 불가능한 인터넷을 너무 과신하는 것도 좋지 않지만 자기 혼자 읽는것에 그치지 않고 너도 나도 여기 저기 게시물을 퍼 나르면서 오해에 오해가 쌓이게 하는 것도 자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퍼나르기가 계속되어 그 소문은 6-7년이 지난 지금도 인터넷 어딘가에서 떠돌아다니고 새로운 정죄자들을 만들어내고 있는것 같습니다.

전 그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그리고 뮤지션으로서의 활동을 새로 하려고 하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 사회가 복음적으로 순수하게 살아있다면 그가 다시 음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할 때 아무런 판단 없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은 그가 90년대 만들었던 앨범들이나 주찬양 사역들에 한창 바쁠 때 그런 심각한 죄를 범했다는 것에 대해 용납하지 못하는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그럴듯한 곡을 쓰면서 사람들을 속일 수가 있는가..? 하지만 저는 그가 그렇게 아름다운 곡들을 쓸 때에도 마음에 죄악된 본성으로 지배받고 심각한 죄 가운데서 그 곡들을 썼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여전히 죄인이고 하나님을 뜨겁게 예배하고 1시간도 되지 않아 어느새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는 걸 종종 경험합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 죄를 끊임 없이 씻어주고 계시다는 것. 이미 예수님이 그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이제 우리가 비난하는 그의 죄는 존재하지도 않는데 우리만 과거에 얽매여서 용납 못하고 있는건 아닌지… 유교적 백그라운드에서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민족의 성향 같습니다. 정말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90년대 말 대학생이었을 때 주찬양과 최덕신 앨범들을 너무 좋아했던 저로서도 정말 가슴아픈 소식이었지만 사람에 대한 판단은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때와 마찬가지로 제일 좋아하는 주찬양 11집, 갈망, 긍휼 같은 최덕신 개인 앨범도 자주 듣습니다. 우리나라 크리스천 사회에 최덕신이라는 분은 너무나 큰 축복인 동시에 우리가 받아들인 복음에 대한 하나님의 강한 도전이라고 생각되네요. 저는 그를 축복하고 사랑합니다..^^


질투라는 암적인 죄문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요21:22)

Os
Guiness의 책 “소명” 중에서 내가 지금까지 얽매여 있었지만 깨닫지 못했던 내 죄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기도를 통해서
해방감을 맛볼 수 있었다. 다른 지체들과의 비교 의식, 그로 부터 오는 얽매임.. 그리고..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내 안에
있는 “질투”라는 암적인 죄 문제를 인정하고 십자가 앞으로 나올 수 있었다..

전통적으로 질투는 일곱가지 큰 죄악 중에서 두 번째로 악하며 두 번째로 만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교만과 같은 육신의 죄가 아닌 영적인 죄이며, ‘냉정하고’, 상당히 ‘모양새 좋은’ 죄다. 이는 탐심과 같이 ‘화끈하고’, ‘보기
흉한’ 육신의 죄와 대조된다. 질투의 독특성은 그 죄를 짓는 자가 결코 즐기지 못하며, 고백하는 경우가 거의 드문 유일한 죄라는
데 있다.

교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현대인은 이 경우에도 질투의 정의를 다르게 내림으로서 고전적인 비난을
회피하려 한다. 어떤 사람이 사업이나 스포츠 등에서 성공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도 성공하길 열망하는 것이 왜 잘못이냐고 말한다.
열망, 경쟁, 우열을 다투는 것은 열린 사회와 자유 시장 경제를 움직이는 추진력이 아닌가?

그러나 질투는 단순히
열망이나 야망이 아니다. 열망과 야망은 건설적인 것이고 소명에서 중심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 이에 비해 질투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명한 정의에 따르면 “다른이가 잘 되는 것에 대해 슬퍼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행복이나 성공을 보면서 우리 자신에 대한 의구심이 들 때 질투가 스며든다. 그러면 우리는 자존감에 상처를 입고 말이나 행동으로 상대방을 우리 수준으로 끌어내리려고 애쓴다. 그들의 성공 때문에 자신이 보잘것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질투심은 우리가 그들을 마땅한 수준으로 끌어내려야한다고 부추긴다. 요컨대, 완전한 질투는 낙담에 비난을 더하고 거기에 파괴를 더한 것이다.

…..”소명” 책에서 15장 중에 나오는 내용

이런 질투라는.. 다른 사람의 인생, 소명과의 비교의식으로 부터 오는 얽매임의 죄 문제에 대해 예수님은 정말 어떻게 보면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한 말씀으로 베드로를 다시 한번 불러 주셨다. 요한복음 마지막 부분에 나온 말씀…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동료 제자 요한과 모르긴 몰라도 비교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던것 같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 정말 어이 없을 정도로
단순하지만 이 단순한 부르심의 음성이 내 안의 죄 문제를 다 드러내고 십자가 앞에 나올 수 밖에 없도록 내 껍데기를 완전히
부숴뜨린 망치질이 된 것 같다. 나 역시 베드로와 똑같이.. 아니 거의 내 영혼을 파괴하다시피 할 정도로 질투와 시기심의 죄는
내 안에 정말 만연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부르심과 사역, 그들 고유의 인격, 모든 것들과의 비교는 정말 쓸데 없는 것
같다. 그 이 중요한 시기에 이런 음성을 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질투라는 암같은 죄문제와 끝까지 싸울 수 있기를.. 그리고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만의 가치와 나만의 목적, 그리고 인생을 살며 추구할 수 있는 꿈과 비전을 주시기를…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한 사람씩 부르신다. 비교는 부질없는 짓이고, 다른 사람에 대한 억측은 시간 낭비이며, 질투는
어리석은 죄악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개별적으로 부름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에게만 책임이 있으며, 그분만을 기쁘시게 해야 하며,
결국에는 그분으로부터만 인정받게 되어 있다.

나의 가치는 유용성에 있을까? 관계에 있을까?



나의 가치는.. 유용성에 있을까? 관계에 있을까?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눅 10:19-20)

- ‘My utmost for his highest’ 매일 묵상집 8월 30일자
-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 하나님의 일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추구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예수님의 말씀은 성공적인 사역을 기뻐하지 말고 우리가 주님고 올바르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뻐라하는 것이다. 성공적인 사역을 보고 기뻐하거나 하나님이 당신을 쓰셨다는 사실을 놓고 기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일에 올무가 된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바르게 결속되어 있다면 하나님이 당신을 통해 무엇을 하실는지 도무지 헤아릴 수 없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지속하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입장에 있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날마다 하나님은 당신을 통해 생수의 강물을 쏟으실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이 그것을 모르게 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이다. 당신이 구속과 성결로 하나님과 올바르게 밀착되어 있으면 당신이 어디에 있든지 있는 그곳이 바로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곳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빛 속에서 계속 사는 한, 당신은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서 당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당성시킬 것이다.


오늘날 교회 풍조는 일을 많이 해야 된다는 것이다. 당신이 쓰임을 받을 유용성이 있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독촉하는 사람들을 조심하라. 유용성을 테스트로 삼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가장 크게 실패한 자이다. 성도의 북극성은 하나님 자신이지 유용성의 견적이 아니다. 가치가 있는 것은 우리가 주를 위해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하시는 일이다. 우리 주님이 인간의 삶에서 주목해 보시는 것은 그의 아버지에게 값어치가 될 수 있는 신앙 관계이다. 예수님은 많은 그의 자녀들을 영광으로 인도하신다.

무엇을 신뢰해야될까..?

요 2: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신 첫번째 기적. 바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사건이다. 과연 하인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 묵상을 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없이는 내 이성과 생각을 초월한 신뢰와 순종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인들에겐 어떻게 보면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단순히 물을 떠 오는 것만으로도 예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헌신을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나는 단순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물을 떠오는 정도의 행위로서의 헌신이 아니라 내 남은 인생의 모든 것을 오직 예수님께만 전적으로 맡길 수 있는 정도의 신뢰를 갖고 살아가고 싶다. 이제 어느 정도 나이도 들어가고 평범하게 살아간다면 앞으로의 진로도 어느 정도 결정이 되어 버려서 더 이상 다른 직업을 갖거나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뭔가 큰 꿈을 가질 수도 없게 되어버린 상황이 아닌가 싶다.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할까? 단지 직업이나 결혼, 물질적인 문제들을 떠나서 내 인생이 어떻게 해야만 가치 있게 되고, 천국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이것이 내가 20대를 살면서 가장 많이 고민했던 문제이고 이 고민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2004년에 6개월간 호주를 여행하면서 하나님이 내게 주셨다고 확신하는 호주 원주민 선교의 길을 걷고 싶고 분명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강한 소망이다. 나 스스로도 그 길을 걷고 싶고 내 직업을 통해서도 조금씩 그 준비를 해 나가고 싶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내가 그 길을 걷도록 하실 계획이라면 분명 지금 이 순간도 그 목표를 향한 삶을 살고 있어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저는 작년부터 북사선을 통해 새터민 아이들을 섬기기 시작하고 있고 이것이 당분간은 변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든다. 솔직히 이것이 나에겐 앞으로의 내 인생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왜 한 방향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할 수는 없는지.. 하나님이 과연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모세에게 떨기나무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나서 “너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내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나에게도 그렇게 알아듣게 확실하게 말씀해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이 말씀이 그 하인들에겐 어떻게 들렸을까? 지금 당장 포도주가 떨어지는 사태가 일어났는데 왜 예수님은 나에게 난데없이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실까? 반문하지 않다. 그저 묵묵히 예수님을 신뢰하는 마음 하나로 힘들게 물을 채웠겠지. 그 예수님의 말씀이 지금 나에게 내 삶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과 만남들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 묵상을 통해 새로 깨닫게 된 사실이다. 얼마 전 my utmost for his highest 책에서 소명이란 제목의 QT를 묵상했었는데.. 그 책에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꼭 어느 누군가를 콕 집어놓고 그 사람에게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라디오 전파처럼 모든 이에게 그 부르심의 말씀을 하시지만 그 부르심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전적으로 신뢰하여 그 부르심에 순종하는 사람만이 쓰임받게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작년부터 내가 북사선을 통해 새터민 아이들을 섬기고, 여러 만남들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라디오 전파처럼 나에게 전달되고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하나님은 어느 순간엔가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가 전혀 생각도 못했던 인생을 하게 하실 수도 있지만 지금 현재 나에게 주어진 삶의 방식과 삶의 목표가 아귀까지 물을 채우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영접하고 지금의 삶에 전적으로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 같다.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은 현재 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는데.. 하인들이 그렇게 순종했을 때 결국 연회장도 알지 못했던 포도주의 근원을 알았던 기쁨을 알았듯이 하나님은 분명 나에게도 어느 순간 내 인생을 되돌아봤을 때 내 인생 한 순간, 한 순간에 간섭하셨던 그분의 계획을 깨닫고 기쁨이 충만하게 될 날을 주실 것이라 확신한다.

사랑은 본능? 본연의 모습..?

지금까지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지만…

새들은 항상 같은 날개짓으로 난다.

독수리는 날개짓을 거의 하지 않고 날개를 쫙 편 채로 기류를 타고

갈매기는 갈매기 특유의 날개짓이 있다.


갈매기끼리 날개짓을 이렇게 하자고 약속한 것도 아니고,

알에서 깨어나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닌데

갈매기들은 자기들만의 날개짓으로 하늘을 난다.

어느정도 각도로 날개를 꺾고 어느정도 주기로 날개짓을 하는지..

모두가 똑같은 모습..


사람은… 학교나 집에서

이렇게 이렇게 사랑을 하라고 교육받지 않았지만

누구나 거의 비슷한 방법으로 사랑을 느낀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왜 이렇게 똑같은 모습으로 사랑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여행을 하면서 본 갈매기떼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음.. 하나님이 지으신 모습이 이대로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지금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자기가 지음받은 본질대로 사랑을 하고,

아무리 상처가 많아도 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사람인것 같다.


만약, 난 상처가 너무 깊어서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면… 그건 자기가 자기 자신이기를 포기하겠다는 말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이 맞는듯..

人生이 곧 사랑이고…

사랑이 곧 人生이기 때문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 1:26)




2006년 11월 경주 여행중에….

나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이 보배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7)





전북은행 본사 전주 출장….



전주에서 2박 3일동안 계속되었던 철야 작업 때문에 무지 피곤한 상태에서 기차를 타려고 전주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차역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데…



기차역 하면 가끔 나타나는 사람들… “저기 차비가 모잘라서 그러는데 돔좀 빌려주세요..”



그날 나에게… 정신지체가 있어 보이는 30대 중반 정도의 한 아저씨가 나에게 익산까지 가야되는데 차비가 없으니 돈을 달라고 대뜸 손을 내밀었다.



대합실에서 계속 그 분을 지켜봤는데 당연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무시했다. 그 분이 나에게 와서 돈을 달라고 했을 때 난 당연히 진짜로 익산까지 가려고 하는게 아니라 구걸의 수단인줄로 알았다.. 그래서..



그 분이 돈을 달라 했을 때 난 돈 대신 익산까지 가는 기차표를 직접 사주겠다고 했다. 그러면 난 당연히 그러지 말고 돈으로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정말로 그 아저씨는 익산까지 가는 기차표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내가 타고갈 기차랑 같은 기차인 새마을호를 끊어주려 했지만 새마을호 기본요금 때문에 코앞인 익산까지 요금이 8천원… 그래서.. 30분만 더 기다리시고 통근열차를 타라고 하고선 1200원짜리 익산행 통근열차 기차표를 사드렸다.



무지 좋아하는 그 아저씨.. 당연히 돈을 얻으려는 수작인줄로만 알았는데…



서울로 가는 길에 생각했다.


내가 무언가 큰 능력이 있어야만…


내 상태, 컨디션이 완벽하고 내 부족함이 없을 때에만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건 좋은 핑계거리게 지나지 않았다는걸 하나님이 그 30대 중반의 정신지체를 갖고 있는 아저씨를 통해 나에게 말씀하려고 하신듯….



익산까지 가는 1200원짜리 기차표가 절실했던 아저씨에게 내가 쓴 1200원은 기적이었을 것이다…



내가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고..


내 영적인 갈급함이 채워지지 않는다거나… 내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스스로 나는 훈련되지 않았고 아직은 하나님을 섬기기에 준비되지 않았다고 고백했던 것들…


내 안에 숨겨진 그 ‘기적’을 스스로 투명한 유리 상자 안에 가둬버렸던 것이라는걸 깨닫는다.


나도 믿지 않는 영혼들에게 기적이 될 수 있다…


아니 기적이 되고 있다….^^



“people want me to do everything for them.


but what they don’t realize is they have the power.


you wanna see a miricle, son?


be the miracle.”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 영화 대사 중에서 하나님이 브루스에게 말하는 대사… 영어듣기 연습하던때 수십번을 봤던 영화… 그 중 가장 꽃혔던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