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라는 암적인 죄문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요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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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ness의 책 “소명” 중에서 내가 지금까지 얽매여 있었지만 깨닫지 못했던 내 죄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기도를 통해서
해방감을 맛볼 수 있었다. 다른 지체들과의 비교 의식, 그로 부터 오는 얽매임.. 그리고..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내 안에
있는 “질투”라는 암적인 죄 문제를 인정하고 십자가 앞으로 나올 수 있었다..

전통적으로 질투는 일곱가지 큰 죄악 중에서 두 번째로 악하며 두 번째로 만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교만과 같은 육신의 죄가 아닌 영적인 죄이며, ‘냉정하고’, 상당히 ‘모양새 좋은’ 죄다. 이는 탐심과 같이 ‘화끈하고’, ‘보기
흉한’ 육신의 죄와 대조된다. 질투의 독특성은 그 죄를 짓는 자가 결코 즐기지 못하며, 고백하는 경우가 거의 드문 유일한 죄라는
데 있다.

교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현대인은 이 경우에도 질투의 정의를 다르게 내림으로서 고전적인 비난을
회피하려 한다. 어떤 사람이 사업이나 스포츠 등에서 성공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도 성공하길 열망하는 것이 왜 잘못이냐고 말한다.
열망, 경쟁, 우열을 다투는 것은 열린 사회와 자유 시장 경제를 움직이는 추진력이 아닌가?

그러나 질투는 단순히
열망이나 야망이 아니다. 열망과 야망은 건설적인 것이고 소명에서 중심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 이에 비해 질투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명한 정의에 따르면 “다른이가 잘 되는 것에 대해 슬퍼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행복이나 성공을 보면서 우리 자신에 대한 의구심이 들 때 질투가 스며든다. 그러면 우리는 자존감에 상처를 입고 말이나 행동으로 상대방을 우리 수준으로 끌어내리려고 애쓴다. 그들의 성공 때문에 자신이 보잘것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질투심은 우리가 그들을 마땅한 수준으로 끌어내려야한다고 부추긴다. 요컨대, 완전한 질투는 낙담에 비난을 더하고 거기에 파괴를 더한 것이다.

…..”소명” 책에서 15장 중에 나오는 내용

이런 질투라는.. 다른 사람의 인생, 소명과의 비교의식으로 부터 오는 얽매임의 죄 문제에 대해 예수님은 정말 어떻게 보면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한 말씀으로 베드로를 다시 한번 불러 주셨다. 요한복음 마지막 부분에 나온 말씀…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동료 제자 요한과 모르긴 몰라도 비교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던것 같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 정말 어이 없을 정도로
단순하지만 이 단순한 부르심의 음성이 내 안의 죄 문제를 다 드러내고 십자가 앞에 나올 수 밖에 없도록 내 껍데기를 완전히
부숴뜨린 망치질이 된 것 같다. 나 역시 베드로와 똑같이.. 아니 거의 내 영혼을 파괴하다시피 할 정도로 질투와 시기심의 죄는
내 안에 정말 만연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부르심과 사역, 그들 고유의 인격, 모든 것들과의 비교는 정말 쓸데 없는 것
같다. 그 이 중요한 시기에 이런 음성을 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질투라는 암같은 죄문제와 끝까지 싸울 수 있기를.. 그리고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만의 가치와 나만의 목적, 그리고 인생을 살며 추구할 수 있는 꿈과 비전을 주시기를…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한 사람씩 부르신다. 비교는 부질없는 짓이고, 다른 사람에 대한 억측은 시간 낭비이며, 질투는
어리석은 죄악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개별적으로 부름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에게만 책임이 있으며, 그분만을 기쁘시게 해야 하며,
결국에는 그분으로부터만 인정받게 되어 있다.

죄에 대한 승리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요일 3:1)




얼마 전부터 나에게 항상 도전되는 말씀은 요한일서 3장 말씀이다. 그 말씀에 의하면 구원받은 백성은 절대 죄를 지어서도, 아니 지을 수가 없다는데.. 왜 나는 구원받은 후 지금까지 여전히 알게 모르게 죄를 짓고 있는가… 내가 죄인임을 애통하게 고백하며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과 첫사랑의 기쁨, 감격을 누렸었는데 지금의 내 모습은 여전히 죄인이다. 어떻게 보면 누구나 빠질 수 있는 딜레마이다. 요일 3:6~10에는 하나님께 속했다면 절대로 죄를 지을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건 99.9%의 크리스천에게 엄청난 고민거리일 것 같다.





난 얼마전 한 성경공부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도전을 받았다.  여전히 죄인된 내 모습에 반해, 성경에서는 죄를 짓는다면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라고 아예 못박아 이야기하고 있다. 그 모임에서는 죄의 현상이 있다면 그것은 구원받지 못한 것이라고 단정짓는듯 했다. 한동안 구원에 대한 혼란스러움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묵상을 통해 새롭게 발견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요일3:1절, 2절에서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다. 사람이라는 존재의 연약함과 한계는 성경 역사에 걸쳐서 잘 묘사된다. 다윗이 그러했고 바울도, 베드로고 그랬다. 구원받았지만 연약함으로 인해 항상 쓰러지는 모습. 하지만 그들은 죄 자체를 즐기고 먹고 마시지 않았다. 다윗도, 바울도, 베드로도 죄를 극복하고 승리하기 위해 분명 몸부림쳤을 것이고, 범죄했을 때에 분명히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자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에게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즉 마귀의 자식이 죄를 범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아이덴티티가 있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크고 작은 죄문제 하나하나에 대한 죄책감과 쓸데없는 고민 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고한 identity인것 같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이런 사소한 죄는 범해도 좋다라는 또다른 자기 합리화의 길을 찾고자 하는것이 아니다. 내가 근본적으로 다른, 새롭게 거듭난 존재라는 것을 항상 잊지 않고 매 순간 순간 삶의 문제와 도전을 상대할때 가장 값진 승리를 맛보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