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와 문화 인류학 (폴 히버트)

1. 책 소개하기

이 책은 폴 히버트라는 인도 선교사 출신의 저자가 쓴 책이다. 저자는 문화 인류학이라는 학문을 선교에 접목시켜 선교를 함에 있어서 반드시 가져야 할 문화적 측면에서의 통찰력을 전달한다. 특히 저자는 인도에서 사역을 하며 겪어야 했던 실수와 시행 착오를 이 책의 다양한 예제 케이스로 활용하여 읽을 거리를 풍부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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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원주민 선교의 당위성

이 글은 호주 정훈채 선교사님 홈페이지에 소개된 호주 원주민 선교의 당위성에 대한 글입니다. 저 역시 2004년 호주에 6개월간 머물면서 호주 교회나 유럽 같은 백인들이 호주 원주민 선교를 함에 있어서 분명 한계가 있겠다는 것은 절실히 느꼈고 한국이나 기타 아시아권에서 더 많은 관심을 갖고 더 많은 선교사가 나가야겠다는 것을 느꼈었습니다.

원주민 선교의 역사

원주민 선교를 처음 시작한 때는 1880년에 호주의 몇몇 단체들이 호주 원주민 선교회를 발족하면서부터 이다. 이렇게 복음을 받은 지 1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호주 어느 곳에도 원주민 목사에 의해 목양된 곳이 한 곳도 없을 정도로 자립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는 백인 선교사들의 선교정책이 정책적으로 원주민들 가운데 영적인 지도자를 세워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0년도에 이르러서 원주민 선교는 원주민들이 직접 참여해야 된다는 주장이 팽배해지자 그제서야 원주민 복음전도회(Aboriginal Evangelical Fellowship, AEF)가 발족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원주민 선교가 26년이 지난 1996년 서부 호주의 발가 지역에 처음으로 원주민 손에 위해 교회가 세워졌는데 이것은 복음을 받은지 120년이 지난 후에 되어진 일이며 이 교회가 원주민 교회 중 유일하게 자립이 되는 교회이다. 1997년 당시 호주에서 유학을 하던 정훈채 목사가 본격적으로 원주민 선교에 참여함으로서 서서히 원주민 교회들이 세워져 가고 있다.


원주민 선교의 당위성

호주 원주민 선교는 호주 정부와 선교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대부분의 원주민들이 마음의 문을 닫고 살고 있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울분을 참지 못하여 마약과 술로 그들의 한을 풀고 있으므로 현재 이것이 사회적인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원주민들은 신분상 공공 기관에 일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들의 풍토상 적응하지 못해서 대부분 실직수당으로 살고 있다. 더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많은 원주민들이 그들만의 고립된 생활을 하므로 풍습 전수식(Aborigines Initiation Ceremony)이라고 하는 토속종교, 무속신앙에 매여 있다.

마을에서 자란 원주민 지도자들은 부흥회나 집회를 통해 회심한 후 은혜를 받아 그들 나름 대로 전도하고 있을 정도며, 간혹 성경학교를 통해 1년간 수학하고 목사 안수 없이 목사(Pastor)라고 하는 호칭을 하고 교회를 이끌어가고 있을 정도이다.

서부 호주의 원주민

지금부터 약 230년 전에 호주는 주로 유럽인들의 집단 이주를 통해 이루어 졌으나 그 전에 이미 검은 색 피부(Black Fellow)를 가진 본래의 원주민(Aborigine)들이 이 광활한 땅에 살고 있었다. 이들의 모습은 검은 피부와 이마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움푹 들어가 있어서 마치 아직 덜 개화된 사람들로 보여지며 현재도 다소 도시화 된 곳을 제외하고는 족장 중심의 생활을 하고 있다.

서부 호주에는 공식적으로 119개의 공동마을이 있으며 이외에도 내륙지역에는 모든 문화를 거부한 채 옹기종기 모여서 살고 있는 원주민을 볼 수 있다. 비록 도시 주변에 사는 원주민들이라 할지라도 지금까지 백인들 틈에 적응하지 못하고 별도의 삶을 살고 있으며 여러 면에서 사실 소외된 삶을 살고 있다.

지금까지 호주 정부와 유럽계(European) 여러 선교단체들이 여러 방면에서 선교를 시도해 왔지만 번번이 실패해왔다. 그 이유는 유럽계 사람들이 호주 땅을 점령하면서 원주민들을 지구상에 멸종시키려 약 27만 명에 이르는 원주민들을 대량학살 한 일이 있으며(실제로 태즈매니아 섬에는 완전히 멸종시켰음), 한 동안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원주민 자녀들을 부모와 결별시켜서 집단 수용생할을 하게 하였으며 또한 정부가 선교단체를 통하여 정치적으로 통제하는 제국주의적인 선교를 해 왔으며 원주민들은 저주 받은 함(흑인)의 자손이므로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비성경적인 논리로 자기 동족을 위한 원주민 지도자를 양성하지 않은 일들로 인하여 백인들 및 그들의 선교단체를 불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원주민들은 약 30만 명 정도 추정하며 이들 중에 기독교인들은 약 2%에 불과하다. 이들이 쓰는 언어는 내륙을 중심으로 약 100여개의 방언을 가지고 있으나 대부분은 영어권 안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텔레반에게 피납된 지체들의 안전귀환을 기도하며


이 글은 중국 관련 카페를 운영하는 石一進님의 글입니다.
원문은 http://cafe.daum.net/MyLoveChina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저자의 허락 하에 글을 게시합니다.

오늘로 아프카니스탄에서 한국인 23명의 피납사태가 발생한지 열 이틀 째이다. 인질로 붙들린 그들을 구명하기 위해 우리나라 정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그들을 피납한 텔레반과의 협상이 순조롭지 못한 모양이다. 몇 번의 줄다리기가 진행되는 동안에 우리나라 인질들 중에 한 분이 살해당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터넷을 통해 이번 피납사태를 알게된 이래로 오늘까지 열 이틀동안 내 마음은 몹시 착잡하고 괴로웠다.

인터넷에서는 이번 사태로 인해 온갖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표현하는 등의 이른 바 악필들이 그 대부분이다. 차마 읽기 거북스러울 정도로 저속한 표현들로 도배한 것 같다. 아무리 보이지 않는 가상공간이라 할지라도 너무한 것 같다. 무책임하게 써 내려가는 글의 폭력 앞에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안타깝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 것일까? 실로 마음이 착잡하고 괴로워 답답하기만 하다.


세계의 언론은 우리나라의 해외선교 방법을 비판하고 나선 듯 하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출발점은 숭고하다고 인정하면서, 이슬람 원리주의가 활개치는 지역으로 신도들을 보낸 것은 맹목적인 종교활동이자 현명치 못한 결정이었다고 비판한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지난 해 여름에도 한국정부의 반복된 경고와 설득을 외면, 무시한 채 많은 한국인 신도들이 대규모 종교활동을 벌리려다 아프가니스탄 당국에 의해 강제 추방된 사건이 있었음을 상기시키면서 한국교회의 무분별한 해외선교 방법을 비판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텔레반에 의해 납치된 곳은 카불에서 칸다하르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 이 길은 죽음의 도로로 불려진다고 한다. 많은 외국인들이 그 길을 지나다가 수시로 출몰하는 텔레반 무장세력에 의해 납치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란다. 따라서 그 길을 부득이하게 지나고자 할 때는 반드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안전수칙은 ‘아침에 출발하라’는 것이란다. 그런데 이번에 피납된 이들은 이런 가장 기본적인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는 아쉬움을 남겼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에는 위험하고 불안한 곳이 너무 많다. 아프가니스탄 이외에도 도처에서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간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신앙과 사상, 그리고 이념으로 인한 분쟁도 치열하다. 참으로 불안전지대가 너무 많다. 이런 지역의 방문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위험한 지역의 방문은 그에 따른 대책을 세워야 한다. 위급상황에서 최소한 자기방어를 위한 훈련은 필수조건일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사태는 어떤 대책도 세워지지 않은 무방비한 상태에서 당하게 된 당연한 결과로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세계 언론의 지적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번 피납사태는 신도들의 관리를 소홀히 여긴 한국교회가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도 있다. 그동안 한국교회의 피상적인 종교활동의 어리석음을 뉘우치며 반복된 일이 발생되지 않도록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이번 피납사태로 말미암아 한국교회의 일반 신도들이 받을 충격을 생각하며 일의 계획이 치밀하지 못한 작은 소홀로 말미암아 가져온 엄청난 결과를 크게 우려하기도 한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이러한 사태의 모든 책임을 통감해야 할 것이라고 요구한다.


참으로 이번 피납사건은 한국교회의 복음주의적 선교열망을 다시 한번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세계언론의 시각이다. 한국교회는 이미 고 김선일씨 사건으로 인해 무분별한 해외선교가 가져다 주는 위험성에 대한 경고를 받은 바가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한국교회의 해외선교 방법론에 대하여 다소 회의적인 반응을 드러내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전체 세계언론이 바라보는 경향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극히 부분적인 시각일 수 있다. 그래도 한국교회는 그들의 비판이나 질책을 겸허하게 받아들일줄 알아야 한다.


미국의 한 언론은 수만 개의 교회가 있는 한국교회의 복음주의적 활동에 불행한 면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경쟁의 과열이라는 지적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세상의 주목을 받기 위해 새로운 곳이나 위험한 곳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더 많은 명성과 돈으로 이어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아냥거린다. 결국 이번 피납사태도 이와 같은 한국교회의 병리적 선교형태가 가져온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는 것이 미국의 한 언론이 보는 시각이다.


지금은 이번 피납사태가 어디서부터, 왜 일어난 사태인지에 대하여 시시비비 따질 때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피납된 이들이 무사히 귀환할 것인가에 총력을 다해야 할 때이다. 그러므로 사건의 진상을 시시비비 따져 밝히며 누구에겐가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사태가 안전하게 해결된 후에 언급되어도 늦지 않는다. 따라서 그 전에는 좋든, 나쁘든 서로가 말을 아껴 비판을 삼가야 한다. 오히려 침묵 가운데 협상자들로 하여금 협상이 잘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어떻든 피납된 이들이 무사히 풀려나는 것이 최고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마음을 연합하여 기도하며 조용히 사태의 결과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지켜보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마음이 조급하고 불안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이번 일을 어떻게 풀어가실 것인지를 인내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왜 위험한 지역에, 그것도 정부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들을 보냈느냐는 책임론을 앞세워 비난하거나 비판하는 일을 삼가고, 어떤 경우에도 이번 사태로 인해 누군가를 원망하는 일도 삼가야 한다.


최근에 인터넷으로 접하는 소식들은 설왕설래다. 종잡을 수 없는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다. 어느 보도를 믿어야 할지 난감하게 여겨진다. 하루에도 몇 번씩 줄다리기가 반복되는 그런 느낌 속에, 순간순간 엊갈리는 소식들 뿐이다. 한국인이 피납되었는데도 우리가 언론을 통해 전해 들을 수 있는 소식들은 외국의 통신사들이 무책임하게 흘리는 정보에 의존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시시각각 피납된 이들의 생명이 풍전등화인 것만 같아 마음이 초조해지고 있다.


우리는 이번 사태에 피납된 한 사람이 결국은 텔레반에 의해 피살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피납자 중에 두 여인의 육성으로 그들이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는지를 가름할 수 있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그들은 모두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운 공포 속에서 심신이 몹시 지쳐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저 막연하게 자기들을 빨리 구해달라고 요청하는 작은 부르짖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 모두는 또 다른 희생자가 생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사태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침착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텔레반의 고도 심리술에 말려들어 일이 더욱 힘겹게 될 수 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아프가니스탄에 대통령 특사를 긴급 파견한 우리나라 정부 관리와 아프가니스탄 정부 당국자들의 협상에 기대감을 가져야 한다. 예상했던 일의 진척이 지지부진할지라도, 끝까지 인내로 더 이상의 인명이 살해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고 피해없이 모두가 안전하게 풀려나오기를 기도하며 기다려야 한다.


이번 사건으로 한 사람이 피살되었다. 우리는 그가 왜 피살되었는지 자세한 내막을 모른다. 그가 목사라는 사실과 한민족복지재단 아프칸봉사단의 단장으로 이번 한국인들의 인솔자라는 사실만 알고 있다. 따라서 그의 죽음에 대한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따라서 아직은 그의 죽음에 대한 평가는 성급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부 한국교회는 그를 순교자로 성급하게 추앙하고 있다. 어떤 이는 우리나라 선교초기에 대동강변에 피를 뿌렸던 토마스 선교사에 비견하여 그를 아프칸의 토마스 선교사라고 칭송하기도 한다.


선교(宣敎)와 봉사((奉仕)란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하여 연세 한국어 전자사전에서는 ‘선교’란 ‘종교를 전하여 널리 퍼뜨리는 것’이며, ‘봉사’란 ‘남을 위하여 자신의 이해를 돌보지 않고 애써 일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민족복지재단 아프칸봉사단이 아프카니스탄에서 활동한 성격은 무엇일까? 선교활동이었는가, 아니면 봉사활동이었는가? 그들의 활동성격이 선교가 목적이었다면 앞서 살해된 분의 죽음은 순교라함이 타당하다. 그는 분명히 선교를 위해 아프카니스탄을 방문하였으며, 그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던 중에 텔레반에 의해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민족복지재단 대표는 기자회견을 통하여 ‘그들이 아프카니스탄에서 활동한 목적은 기독교의 선교가 목적이 아니다. 순수한 봉사가 목적이었다’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한민족복지재단은 스스로 기독교 선교기관이 아니라 순수한 국제적인 봉사를 위한 국제 NGO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봉사단체라고 강변한 것이다. 그는 계속하여 ‘아프가니스탄에는 기독교 선교기관은 하나도 없다. 오직 NGO로서 국제봉사단체만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단다. 그렇다면 앞서 살해된 분의 죽음을 선교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자기가 해야 할 일에 충실하다가 변을 당하여 죽게 된 이들에게 ‘순직했다’는 말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국제봉사기관으로서 한민족복지재단 아프칸봉사단의 단장으로 아프칸 봉사할동 중에 변을 당하여 죽임을 당한 그는 순직자라고 함이 타당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그를 순교자 운운하면서, 그가 아프카니스탄에서 흘린 피는 그 땅에서 복음의 기초가 될 것이라고 성급하게 추앙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직은 이번 피납사태로 목숨을 잃어 버린 분에 대하여 순교자라거나 순직자라는 이름으로 추모하는 일은 시기상조이다. 한국교회가 그를 순교자로 추앙하게 된다면 아직 해결짓지 못한 사태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좀더 조용히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한다. 사태의 추이가 어떻게 해결될 것인지 해결의 실마리가 풀려지기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도리라고 여겨진다.


언제부터인지 자세하게 가름할 수는 없지만, 한국교회에는 해마다 휴가기간이면 단기선교라는 명분으로 짧게는 일 주일에서, 한 달 미만의 해외원정을 떠나는 일로 붐을 이루고 있다. 특히 선교학적으로 창의적 접근지역이라고 분류되는 위험한 지역에도 무분별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많은 해외원정대를 ‘단기선교’ ‘미션트립’ ‘비전트립’등을 명분으로 파송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들이 해외 현지에서 내세우는 명분의 대부분은 ‘봉사’임을 주장하고 있다.


앞에서 사전적인 설명을 했거니와 ‘선교’와 ‘봉사’는 동일한 의미가 아니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단기선교라는 명분으로 지원자를 모아 해외원정대로 ‘단기 선교사’로 파송하면서 해외의 현지에서는 ‘순수 국제봉사단’이라고 강변하는 이중적인 태도는 신실하지 못한 태도이다. 이것은 처해진 상황에 얼마든지 변신할 수 있는 카멜레온 전략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결과가 해외의 현지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되면 ‘기독교 선교단체’가 아니라 ‘순수한 봉사단체’라고 강변하기에 바쁘고, 아무 문제없이 무사히 귀국하면 ‘성공적인 단기선교를 하고 돌아 왔다’고 자화자찬을 아끼지 않는 모순된 일을 자행하게 되는 것이다.  


선교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해외원정은 무조건 복음을 전하는 선교라는 발상은 바르다고 할 수 없다. 해외봉사와 해외선교를 동일한 이해로 받아들이는 일은 위험한 일이다. 선교는 틀림없는 복음의 전도가 목적이어야 하며, 봉사라 할 경우에는 선교가 목적인 봉사인지, 단순한 봉사인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봉사를 선교와 결부시키는 일은 어떤 면에서 이율배반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될 수 있음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교회에 붐을 이루고 있는 일 주일이나 한 달 미만의 짧은 선교지 방문을 굳이 해외 단기선교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의 단기원정이 해외의 선교일선에서 일하는 사명자들의 사역을 증진시키는 기회가 된다고 여기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묵묵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일하는 이들에게 누를 끼치는 해악이 되고 있는 경우가 너무 많이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왜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며 단기선교라는 명분의 해외원정에 목숨을 걸고 있는 것처럼 비쳐지는 것일까?


마음이 몹시 착잡하고 괴롭다. 한국교회의 단기선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암담하게 여겨질 때가 너무 많다. 좀더 치밀한 선교전략 가운데 은밀한 중에 조용히 일하는 모습이 아쉽다. 세계교회에서 미국교회 다음으로 다른 나라에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선교대국이라고 자화자찬하기 이전에, 참된 선교정책과 선교전략이 세워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선교지에서의 위기관리 능력이 부끄럽게도 ‘0’에 가까운 수준인 한국교회의 실상을 보면 너무 속상하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이해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능력이 아직은 미숙하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다.


우리나라에도 불과 120여 년에는 조선민족의 마음 문은 꽁꽁 얼어 붙어 있는 상태였다. 이 때 우리민족을 섬기기 위해 청춘의 몸을 불태웠던 벽안의 선교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나라에서 배우자와 자식을 잃거나 부모를 잃어 우리나라 땅에 묻으면서 그저 말없이 수고하며 눈물 뿌려 일했던 사실을 우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들의 수고와 헌신은 요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말없이 조선민족들에게 빛이 되었고, 소금이 될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교회는 어떤가? 너무 요란하게 떠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의 비전과 욕망까지도 마치 주님의 것인양 간주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떼를 쓰고 있는 모습은 아닐까?


이제라도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자중하는 것이 아닐까? 조용히 주님 앞에 침묵하며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이번에 일어난 아프가니스탄의 피납사태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그들 모두가 안전하게 풀려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하고 있다. 정말 우리는 이번 사태가 어떤 결과로 끝나게 될지 모르고 있다. 우리는 피납된 두 명의 여인들이 들려준 목소리를 들었다. 언제 죽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 빨리 자기들을 구해달라고 호소하는 음성을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모두의 마음이 아프고 답답할지라도, 그들이 처한 환경을 생각하면 가슴이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지는 아픔을 느낄지라도, 그렇지만 어찌하랴. 그러므로 더 이상은 너무 시끄럽게 굴지 말아야 한다. 이번 사태에서 죽임을 당한 이가 순교자로 추앙되든, 순직자로 추앙되든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 일로 너무 시끄러우면 오히려 텔레반을 자극하는 일은 되지 않을까?


조금만 참자. 그대신 주님 앞에 조용히 엎드리자.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바르게 분별하기 위해 침묵하며 주님의 마음을 느끼기 위해 힘 쓰자. 주님께서 이번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이시는 것인지가 중요하지 않은가! 이제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주님의 뜻을 구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기도하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일일 뿐이다. 기다리자. 주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오, 주여! 텔레반에게 억류된 우리 지체들을 도우소서. 그들을 구원하옵소서. 그들의 생명을 보호해 주옵소서. 그들에게 주님께 더욱 충성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만 더 허락해 주옵소서.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주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역사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07. 6. 30 (월)


글/
불꽃 石一進

중등부 단기선교 후기 (벧전 3:8-9)

중등부 단기선교 후기


8월 9일 출발 당일에도 저는 이번 선교를 통해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어떤 일을 이루실지 알지 못했습니다. 팀원 중 유일하게 칼출근을 해야 하는 직장인이었던 까닭에 준비 기간 중 새벽기도하고 아침만 먹고 출근을 해야 했고 마임, 찬양은커녕 간단한 일본어 회화 그리고 영적인 준비도 되지 않은 솔직히 스스로에 대한 적지 않은 실망감을 안고 출발을 했습니다. 출발 당일까지도 아이들 이름을 제대로 외우지 못하고 팀에서 아무런 할 일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제가 붙들었던 말씀은 잠19: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 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2001년 중국 연변 비전 트립을 떠나면서 비슷한 상황에서 의지했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기도 가운데서 분명 하나님은 이번 선교를 통해 내 안에 역사하시고 나를 통해 뜻을 이루시길 원하신다는 믿음과 확신을 갖고 출발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내 머리로는 알지 못하지만 차차 안개가 걷히듯 보여줄 것이라는 확신과 기쁨이 제 안에 있었습니다.


첫째 날 도착 직후 역시 신실하신 하나님은 내가 일본에 왜 왔는지 이유를 알게 하셨습니다. 이혜진 선교사님의 선교 특강을 통해 일본의 근대 기독교 핍박에 대해 알게 되었고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일본 사람의 폐쇄적인 성향, 일본인 친구들을 통해 보아왔던,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신뢰를 주지 않는 그들의 성향에는 극도로 잔인한 일본 근대 기독교 핍박에 그 백그라운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거리의 일본인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나로 하여금 그들의 상처를 깊이 체휼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최근 저는 우리반의 한 학생을 여름수련회에 초청하면서 그 학생에 대한 깊은 긍휼의 마음을 체험했습니다. 그 학생의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났습니다. 처음에는 알지 못했지만 그런 마음이 바로 그 학생이 앞으로 겪게 될 아픔과 상처가 이미 내가 사춘기 때 겪었던 큰 상처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수련회가 끝난 후 기도 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대해서도 본격적인 일정에 앞서 그들이 갖고 있는 아픔과 상처를 먼저 보여주시고 그 아픔을 마음으로 겪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너무 섬세하고 감사했습니다. 바로 ‘상처 입은 치유자 – Wounded Healer’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4박 5일의 일정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습하고 무더운 날씨에 몸이 지치고 길거리에 그냥 쓰러져 잠들고 싶을 정도로 육체적인 한계를 경험했습니다. 4일째 날 한 신사 앞에서 기도할 때에는 아찔한 현기증과 구역질에 귀신이 내 몸을 들락거리며 기도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느껴졌습니다. 10분도 안되는 짧은 기도 속에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승리를 선포하며 평안함을 찾을 수 있었지만 난생 처음 겪는 마귀의 직접적인 공격, 무더운 날씨로 인한 육체의 한계, 모두가 지쳐서 하나되지 못하고 영적 싸움에서 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등은 저에게 마귀의 큰 도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도전에서 결국은 승리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나중에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지만 비전교회 이혜진 선교사님은 저와 같은 캠퍼스 선교단체 출신입니다. 그런 공통점 때문인지 선교사님과의 대화가 즐거웠습니다. 선교사님께서는 그런 대화 중에 저에게 꼭 일본에 와서 사역하라는 말씀을 4-5번에 걸쳐서 하셨습니다. 그냥 지나가는 말이 아닌 진지한 콜링이었습니다. 이미 호주 원주민 자비량 선교에 비전을 갖고 인생의 방향을 그쪽으로 향해서 살고 있던 저에게 일본으로 오라는 진지한 말씀은 나의 남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라는 말이나 다름 없는 말입니다. 당연히 거부감이 들어야 하고, 평소의 저였더라면 두말할 것 없이 정중한 거절의 말이 나왔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저는 그때마다 선교사님 앞에서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일본에 대한 상한 마음을 내 안에 주셨는데 선교사님의 그 요청을 거절할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앞으로의 제 인생을 제가 모든 것을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케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해야 할 곳이 일본이든 호주든, 중국이든 북한이든 오직 하나님이 인도해주시는 대로만 따라가겠다는 다짐을 했을 때 역시 마음에 평안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일본 총리가 광복절에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한 뉴스를 보며 전 이전과는 다른 일본 민족과 그 지도자에 대한 불쌍한 마음으로 다가왔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단기 선교를 통해 내 안에 이루신 성령의 열매로 인한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제는 일본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중보자의 위치에 서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 알게 된 이상 과거 그들이 우리에게 했던 일들이나 현재 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는 시사 이슈들과는 100% 별개로 일본에 대한 상한 마음을 품고 기도하고자 합니다. 한국에 도착한 후 기도를 하며 이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단기 선교를 통해 내 안에 이루신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 받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3:8-9)